영국 계급사회에 대한 성찰, Pulp [Different Class] (1995)

매니아의 음악 서재

영국 계급사회에 대한 성찰, Pulp [Different Class] (1995)

2020.07.16
Special

영국 계급사회에 대한 성찰, Pulp [Different Class] (1995)

영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짤막한 상식 하나로 시작한다. 혹시 영국에 "방언"이 몇 개나 존재하는지 알고 있나. 무려 30개가 넘는다고 한다. 방언 아닌 표준 영어의 경우 "Received Pronunciation(줄여서 RP)"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접하고 동경하는 바로 그 영어라고 생각하면 거의 정확하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RP를 쓰는 인구는 영국 인구의 3퍼센트에 불과하다. 영국의 상류층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니까, 달랑 3퍼센트가 구사하는 발음이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수식을 가져간 셈이다. 자세한 내용이 더 알고 싶다면 "영국 영어 이렇게 다르다",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책 홍보하는 건 아니다.

글ㅣ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Album

Pulp [Different Class] (1995)

Different Class


그렇다. 언어는 곧 계급이다.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도 서울말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데 영국은 (위에 설명했듯이) 언어로 계급이 갈리는 정도가 훨씬 심한 사회다. 발화가 시작되는 순간 출신 성분이 갈리고, 계급이 정해진다고 보면 된다. 펄프의 리더 자비스 코커(Jarvis Cocker)에겐 이게 영 불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좀 웃겼던 것 같다. 그는 [Different Class]를 통해 영국이라는 계급 사회를 날카로운 유머로 성찰한다.

대표곡이라 할 'Common People'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야기 속 화자는 평범한 남자다. 자비스 코커의 분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사는 이렇다.

"She came from Greece/She had a thirst for knowledge/She studied sculpture at St. Martin's College(그녀는 그리스 출신이지/지식에 목말라 있는/세인트 마틴스 콜리지의 조각 전공생이었어)."

곡 속에서 노동계급 출신 남자는 부유한 미대 출신 여자를 만난다. 이 여자는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어." 이건 일종의 관음증이다. 평범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나는 부자지만 일반적인 부자들과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획득하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 곡의 마지막에 가서 자비스 코커는 이 여자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냉소하고 풍자한다.

"But still you'll never get it right/`Cos when you're laid in bed at night/Watching roaches climb the wall/if you called your Dad he could stop it all Yeah(하지만 넌 이해 못할 거야/자려고 침대에 누었을 때/바퀴벌레가 벽에 있는 걸 본다면/아빠에게 전화해서 해결해 달라고 하면 될 테니까)."

기실 당시 영국은 실제로 "계급 전쟁" 중이었다. 북부 태생 오아시스(Oasis)와 런던에서 결성된 블러(Blur) 간의 충돌이 워낙 거대해 문화적으로는 거의 분단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적어도 계급에 관한 음악적 논평에서라면 펄프(Pulp)의 [Different Class], 그중에서도 'Common People'이 왕좌의 자리를 허락받는다. 이 곡은 "최고의 브릿팝"을 꼽는 BBC 라디오의 독자투표와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의 독자투표에서 모두 1위에 올랐다.

이에 걸맞게 수록곡들은 키치와 퇴폐 사이를 능글맞게 유영하면서 듣는 이를 잡아당긴다. 노동계급 청년의 절망을 코믹한 노랫말과 번쩍거리는 디스코 리듬으로 풀어낸 'Disco 2000'은 'Common People'과 함께 펄프 열풍을 진두지휘했고, 'I Spy'는 자비스 코커가 천착해온 섹스와 관음이라는 주제를 관능을 넘어 음란하기 짝이 없는 서사로 풀어내 찬사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글램 록 'Mis-Shapes'에서는 노동계급의 좌절을 그려냈는데 이게 대체 희화화한 결과물인지 응원하기 위해 쓴 건지 알쏭달쏭할 지경이다. 정답은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펄프는, 자비스 코거는 발가벗겨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천상 예술가다. 영국 계급 사회에 현미경을 들이댄 이 앨범에서 그는 관찰자에만 머물지 않는다. 거의 1인칭에 가까운 서술로 저 자신도 그 일부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예술적인 해석을 더한다. 그의 예술이 수직적인 층위에서 써진 게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그의 예술은 이를테면 전당의 예술이 아니다. 거리의 예술이다. 그러면서도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노랫말로 감탄을 불러온다.

펄프의 음악을 경박하다고 보는 관점도 있는데 정확하다. 자비스 코커의 말을 먼저 들어본다. "팝은 싸구려 전율에 관한 것이다. 음악이 자신을 심각하게 여기고 스스로 중요성을 부가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팝이 심오해지는 순간은 단지 표면을 건드리고 잡음을 만들어낼 때다." 그는 영국 사회를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되 끝끝내 진지충의 자세와는 거리를 둔다. 그는 경박을 경유해 심각에 다다르고, 저급하고 외설적인 주제로부터 기묘한 고상함을 이끌어낸다.

한국에서 펄프의 음악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기실 음악적인 이유에 더 가깝다. 영어 잘하는 사람 많아진 지금이야 사정이 다르지만 1990년대 중반 당시 가사에 자극받았던 경우는 많지 않을 거다. 이렇게 그들은 음악으로 비영어권 국가를 매혹하고, 언어로는 자국 청년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컬트"적"인 걸로도 모자라 영국"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음악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바탕이다. 과연 그렇다. 결국 곡이 좋아야 한다는, 뻔하지만 진리인 결론이다. 한데 진리는 깨닫고 보면 뻔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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