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nion All Star Jazz Band의 연주를 들으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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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nion All Star Jazz Band의 연주를 들으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2020.08.03
Special

Reunion All Star Jazz Band의 연주를 들으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옛날의 동지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Joshua Redman(색소폰), Brad Mehldau(피아노), Christian McBride(베이스), Brian Blade(드럼). 이들 네 명이 함께 스튜디오에 들어선 것은 1994년 이후 무려 26년 만입니다.

26년 전 이들은 Joshua Redman Quartet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였지만 이제는 각기 자신의 밴드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더 나아가 오늘날 재즈를 이끄는 중심인물들이 되어, 이들 모두의 이름을 앞에 내걸고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앨범 타이틀은 [Round Again]. "다시 돌아와서"란 뜻의 제목입니다. 이 앨범 가운데서 Redman의 작품 'Undertow'와 'Silly Little Love Song', 이 두 곡 사이에 Mehldau의 작품 'Moe Honk'를 들어보겠습니다.

젊은 시절, 재즈의 판도를 뒤바꿔 보겠다는 야심으로 뭉쳤던 젊은이들이 어느덧 거물이 되어 다시 뭉쳤던 사례들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밴드가 비밥의 창조자들이 다시 모였던 소위 "The Quintet"이었습니다. 1953년 5월 15일 캐나다 토론토 매시홀에서 공연을 가졌던 이들은 Dizzy Gillespie(트럼펫, 당시 36세), Charlie Parker(알토 색소폰, 33세), Bud Powell(피아노, 29세), Charles Mingus(베이스, 31세), Max Roach(드럼, 29세)로, 대략 8~9년 전 비밥이라는 새로운 재즈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40년대의 "악동"들이었습니다. 이 멤버들 가운데 Charles Mingus만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연주자들은 모두 Dizzy Gillespie Quintet의 멤버들이었는데 이후 각자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하다가 서른 살을 전후로 한 나이가 되어 The Quintet이란 이름의 올스타 밴드로 다시 뭉친 것입니다.

이들의 '53년 실황녹음은 역사적 가치 그리고 화려한 연주로 재즈명반의 리스트에 늘 오르는 명반입니다. 하지만 이 음반을 자세히 들어보면 비밥이 이미 등장한 지 당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체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마이너리티" 음악으로서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비밥은 여전히 아방가르드 음악이었던 것입니다.

토론토 재즈 협회의 초청으로 이뤄진 이 공연을 연주자들은 당연히 녹음으로 남기고 싶었으나 당시 Charlie Parker가 계약을 맺고 있던 클레프 레코드(오늘날 버브 래코드의 전신이자 당시에는 메이저 음반사 머큐리 레코드의 산하 레이블)의 Norman Granz는 난색을 표했고, 오히려 전속 계약을 맺고 있던 Charlie Parker는 표지에 얼굴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도 쓸 수 없다고 통보를 합니다. 그래서 이 앨범의 표지에는 유일하게 Parker의 얼굴만이 나와 있지를 않고 초기 LP를 보면 이름도 Charlie Chan이란 가명(그의 부인 Chan Richardson의 이름을 성으로 가져다가 쓴)을 사용했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다행히도 Dizzy Gillespie가 클레프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것은 이듬해인 1954년이었습니다).

당연히 전문 엔지니어 없이 조야한 장비로 녹음한 이 음반의 녹음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음반을 대신 발매하기로 했던 데뷔 레코드의 제작자 Charles Mingus는 자신의 베이스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자신의 연주만을 나중에 따로 오버더빙해서 전체 사운드의 밸런스가 깨진 기이한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주의 열기, 생동감만큼은 녹음의 한계를 뚫고 우리의 심장에 다가옵니다. '40년대 스튜디오에서 주로 녹음되었던 78회전 음반(러닝 타임 3분대)의 속박에서 벗어나 특유의 광기를 발산하는 비밥의 참모습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197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George Wein은 페스티벌 프로그램으로 "Herbie Hancock 음악 회고전"을 기획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재즈의 카멜레온"이었던 Herbie Hancock이 그가 자신이 시도했던 여러 밴드들과 연속으로 무대에 오르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건반주자 Herbie Hancock은 1960년대 자신의 음악을 함께 연주했던 Wayne Shorter(색소폰), Ron Carter(베이스), Tony Williams(드럼)에게 연락해 이 무대를 위해 함께 연주하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들은 모두 '60년대 Miles Davis Quintet의 멤버들로 당시 Miles의 음악을 다시금 재즈계의 정상으로 끌어 올렸던 주역들이었습니다. Herbie, Ron, Tony는 1963년부터 Miles와 연주했고 Wayne은 1년 뒤인 '64년에 Miles Quintet에 가담함으로써 이 황금 밴드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Miles 휘하에서 '67년까지 연주하게 됩니다.

당시 Herbie Hancock은 Miles의 사이드맨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앨범들을 독립 음반사였던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녹음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평소에 함께 연주하던 Miles Quintet의 멤버들을 그대로 기용했고 트럼펫 자리에는 발군의 연주자 Freddie Hubbard를 초대해왔습니다. 그렇게 결성된 이들은 모두 '7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함께 서게 됩니다. 당시 36세의 Herbie, 38세의 Freddie, 43세의 Wayne, 39세의 Ron, 31세의 Tony, 모두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날 페스티벌 무대에는 세 팀의 Herbie Hancock 밴드가 무대에 올랐지만 그중에서 이들 '60년대 밴드에 대한 평론가들과 관중들의 반응은 특별했습니다. '70년대 당시가 퓨전의 시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이외의 결과였습니다. 평론가들은 "다시 재즈가 돌아왔다!"며 이들의 활동을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 번의 공연에 그치지 않고 몇 번의 공연을 더 하기로 하고 그들의 밴드를 V.S.O.P.로 명명했습니다. 코냑 지방 브랜디의 숙성 기간을 표시하는 등급(V.S.O.P.: Very Superior Old Pale)을 패러디한 이 이름은 이들이 한시적으로만 모인 밴드란 의미(Very Special Onetime Performance)를 지녔는데 하지만 재즈팬들의 열광적인 호응으로 이들은 '76년을 시작으로 '79년까지 활동하면서 넉 장의 음반을 발표하게 됩니다.

바이브라폰 스타일의 대혁신을 몰고 온 연주자 Gary Burton 앞에 1974년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더벅머리의 이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네 살 때부터 Burton씨의 음악에 완전 히 빠져 있었어요. 웬만한 곡은 다 외우고 있습니다." 그는 Burton 앞에서 몇 곡을 기타로 연주했고 Gary Burton은 이 청년을 자신의 밴드에 바로 가입시킵니다. 이미 밴드에는 명 기타리스트 Mick Goodrick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이때부터 Gary Burton 밴드는(이 밴드로서는 유래가 없었던) 트윈 기타리스트 편성을 사용하게 됩니다. Gary Burton 밴드에 즉각 발탁된 당시 스무 살의 청년은 오늘날의 그 유명한 Pat Metheny였습니다.

Pat Metheny가 이 밴드에 가입했을 때 그는 Gary Burton의 음악 속에서 늘 경청하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1974년 당시에도 이미 10년 전부터 Gary Burton과 함께 연주하고 있던 명 베이시스트 Steve Swallow였습니다. 이들은 Gary Burton 밴드를 통해 '70년대 새로운 재즈 사운드를 만들어 나갑니다. Pat Metheny는 자신의 첫 앨범을 발표했던 '76년까지 2년 동안 Gary Burton과 활동했고 Steve Swallow는 그의 동반자 Carla Bley 밴드에서 활동하면서도 Gary Burton 밴드와의 활동을 '87년까지 병행해 갑니다. 이후 이들은 제각기 자신이 이끌고 속한 밴드에서 활동을 이어 나갑니다.

Pat Metheny가 28년간 맹렬하게 이끌었던 자신의 밴드 Pat Metheny Group(PMG)이 2005년 해산한 뒤 Burton은 Metheny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제 우리 다시 뭉칠 때가 된 거 아니야?" 이를 계기로 '70년대 함께 활동했던 Burton-Metheny-Swallow 라인업은 다시 결합되었고 드럼 자리에는 PMG의 마지막 3년을 책임졌으며 버클리 음악대학 시절 Burton의 제자이기도 했던 Antonio Sanchez가 안게 됩니다.

네 명의 이름을 앞에 내건 이 사중주단이 2007년 투어에 나섰을 때 Gary는 64세, Pat은 53세, Steve는 67세, Antonio는 36세로, 크게 보면 이들의 나이 차이는 아버지와 아들뻘이지만 연주에서만큼은 전혀 그 세대 차이를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젊었고 그들은 30년 전부터 언제까지나 음악적 동료였던 것입니다.

1994년 당시 가장 촉망받던 재즈 색소폰의 샛별 Joshua Redman은 새로운 멤버의 사중주단을 결성합니다. 멤버들은 그가 '91년 음악계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가까운 친구였던 젊은 연주자로, Brad Mehldau, Christian McBride, Brian Blade가 Redman의 새 식구였습니다. 당시 모두 20대였던 이들은 Redman의 세 번째 앨범 [Moodswing]을 함께 녹음했는데 '90년대 재즈의 "영라이언"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이들의 연주를 담은 이 작품은 기대처럼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명반으로 손꼽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중주단은 불행하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Christian McBride와 Brad Mehldau 역시 '94~'95년에 모두 데뷔앨범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밴드를 이끌었고 Blade 역시 그를 필요로 하는 레코딩 세션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네 명의 연주자는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재즈를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로 바쁘게 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들은 2019년 Joshua Redman의 제안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세월은 흘러서 [Moodswing] 시절 모두 20대였던 이들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51세의 Redman, 50세의 Mehldau와 Blade, 48세의 McBride.

Steve Swallow의 말대로 재결성 밴드란 종종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과거의 명성에 기대어, 이전에 듣던 음악을 또 들려주기 쉽고, 그 가운데 자신들이 늙었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 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Redman이 밝힌 대로 이들의 모임은 그 보다는 더 근본적인 갈급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신인시절에 비해 현재의 음악적 기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고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도 훨씬 밝아졌음에도, 쉼 없이 달려온 지난 26년의 세월 속에 과거와 같은 음악적 호기심, 흥분은 어느덧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스스로에게 들었던 것입니다. 늘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자신, 자신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재즈처럼 즉흥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 내는 음악에게 무감각해진 자신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데도 말이죠. 그래서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연주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사로 상대방을 자극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재결성을 주도한 Redman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들의 재결성이 단발로 그치지 않고 마치 V.S.O.P.처럼 한동안 지속되어 새로운 음악적 결실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그것은 한 재즈팬으로서의 바람이자, 비슷한 연배의 한 사람으로서(솔직히 말하면 좀 더 나이가 많습니다ㅜㅜ) 새롭게 발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싶은 바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Redman, McBride, Mehldau, Blade의 작품을 이들 모두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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