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M 특유의 '차분한 소리'가 가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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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M 특유의 '차분한 소리'가 가능한 이유

2020.08.05
Special

ECM 특유의 '차분한 소리'가 가능한 이유

"오디오는 미신이 아니다 2" 취재를 위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명한 오디오파일인 윤광준 선생의 작업실 비원(지하 1층에 있다고 해서 B1. 윤광준 선생의 절친인 김갑수 선생의 작명 센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보통 남의 집에 소리를 들으러 갈 때에는 그 집에서 가장 좋은 소리가 나는 앨범을 꺼내놓기 마련입니다. 소리 역시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고, 그렇기에 대부분 집 주인이 틀어주는 음악이 가장 좋게 들리기 마련이죠. 바로 이 점이 남의 집에 청음하러 갈 때와 내 오디오를 살 때의 차이점인데요. 남의 집에 청음하러 갈 때에는 그 집 주인이 틀어주는 소리가 가장 좋은 소리이지만, 내 오디오를 살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테스트 음원을 들고 가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포칼의 그랜드 유토피아처럼 유닛이 여러 개 달려있고 크기가 큰 스피커가 있는 집에서는 말러의 교향곡 1, 2, 4, 5번이나 베토벤 교향곡 9번 정도를 꺼내놓고, JBL 스피커가 있는 집에서는 비밥이나 하드밥 시절의 재즈 앨범을 꺼내놓고 있죠. 성능 좋은 북쉘프 스피커가 있는 집에서는 성악이나 여성 보컬 앨범을 꺼내놓고 있고요. 그런데 비원에 갔을 때 제 눈에 가장 먼저 보였던 앨범은 Keith Jarrett Trio의 [Tribute] 앨범이었습니다. '호오, 광준이형. 그렇게 자신 있단 말이지?'

Album

Keith Jarrett Trio [Tribute]

Tribute

제가 ECM의 앨범을 좋아한다는 건 저를 아는 사람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고, SNS 등에 ECM 앨범을 자주 소개하다 보니 농담처럼 "너 유니버설 뮤직에서 돈 받았냐?"라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ECM의 유통사가 유니버설 뮤직입니다. 필자 주). 돈은커녕 물 한 잔 얻어 마신 적이 없는데 말이죠.

대부분의 ECM 앨범들의 녹음 퀄리티가 매우 뛰어나다는 건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재즈 레이블 중에서는 유일하게 FM 어쿠스틱스나 골드문트 등의 초고가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에서 들어도 어색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소리가 나고 오디오 세팅만 제대로 되어있다면 저가의 입문용 오디오 시스템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죠. 그리고 많은 분이 이런 ECM 사운드의 특징으로 높은 수준의 해상도를 꼽습니다.

100% 동의합니다. 녹음의 기본 중의 기본은 원 소스의 해상도를 살리는 일입니다. 해상도가 살아야 머릿속에서 무대도 그려지고 악기의 위치도 그려지죠. 물론 이는 믹싱/마스터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해상도가 떨어지면 무대의 크기나 악기의 위치도 흐릿하게 그려집니다. 그렇기에 ECM 레이블에서 나온 앨범을 들어보면 마치 눈앞에서 연주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ECM 사운드에는 단지 해상도나 믹싱/마스터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있습니다. 소리가 정돈되었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기에 ECM 레이블의 앨범을 들으면 블루노트나 프리스티지, 임펄스! 등 다른 재즈 레이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차분함이 있습니다. 블루노트 레이블의 소리가 S급 연주인이 술도 마실 수 있고 춤도 출 수 있는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는 느낌이라면 ECM 레이블의 소리는 실용음악과 교수들이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하는 느낌이죠.

이 단정된 느낌의 비밀은 억제된 다이내믹스에 있습니다. 물론 컴프레서를 써서 인위적으로 다이내믹스를 줄인 게 아닙니다. ECM 소속 아티스트들은 북유럽 재즈의 특징처럼 연주 자체가 흥겨움보다는 의미와 메시지를 강조하고, 그러다 보니 마치 수도하듯이 연주를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Keith Jarrett이나 Charlie Haden, 그리고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John Abecrombie 등이죠(재미있는 건 이들이 ECM의 북유럽 스타일 재즈를 정립한 ECM의 대표 아티스트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미국인입니다. 필자 주). 물론 녹음도 이들의 연주 성향에 맞춰 했고요. 그래서 ECM 레이블의 앨범은 다른 레이블의 앨범보다 게인이 약간 낮은 듯한 느낌이고, 이는 약음을 잘 포착할 수 있는 하이엔드 오디오로 들었을 때 장점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이게 ECM 특유의 차분함의 비밀입니다.

차분함은 해상도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대편성 오케스트라처럼 악기수가 많은데 해상도가 너무 높으면 그 많은 악기들의 소리를 담느라 소리는 번잡스러워집니다. 해상도와 다이내믹스의 접점을 조율하는 게 노하우이고, ECM은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그걸 가장 잘하는 레이블입니다. 그렇기에 재즈에는 JBL로 상징되는 15인치 정도의 대구경 우퍼가 어울리지만 ECM의 앨범에는 B&W 류의 더블 우퍼가 더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 앨범은 좀 특이합니다. 드럼의 심벌즈나 콘트라베이스의 여음도 잘 표현되면서도 다이내믹스는 블루노트의 아트 블래키 앨범 수준입니다. 그렇기에 이 앨범은 다른 ECM 앨범과는 달리 아주 기분 좋게 신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앨범을 제대로 들으려면 오디오 시스템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해상도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다이내믹스 역시 좋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이 앨범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시스템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책 취재를 위해 그렇게 많은 집을 다녔어도 서너 집 정도? 그 정도밖에는 안 됩니다. 그런데 탄노이 모니터 골드 유닛에서 이 앨범을, 그것도 나를 상대로 들려주겠다니 "대체 이 패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싶었는데 탄노이의 대구경 우퍼와 슈퍼트위터 그리고 강력한 솔리드스테이트 앰프의 조합, 여기에 잘 세팅된 턴테이블로 윤광준 선생은 이 앨범으로 저를 맞이한 이유를 증명했습니다.

이 앨범은 Keith Jarrett의 앨범 중에 두드러지게 인기가 많거나 뭐 그런 앨범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디오에 취미가 있다면, 좋은 소리에 관심이 있다면 이 앨범은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들어보시면 왜 제가 꼭 들어보라고 말씀 드렸는지 이해되실 겁니다. 그중에서도 'Ballad Of The Sad Young Men'에서의 브러슁 드럼 소리나 'All The Things You Are' 인트로의 피아노 솔로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녹음한 라이브 앨범에서 이렇게 다른 성향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 경외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Album

Keith Jarrett [Belonging]

Belonging

이와 비슷한 앨범으로는 Keith Jarrett Quartet의 [Belonging] 앨범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이 담겨있으면서도 멜로디 악기로 Jan Garbarek의 색소폰이 추가되어 여러분이 알고 계셨던 Keith Jarrett의 다른 앨범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놀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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