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한 K-Pop의 네 가지 사례

매니아의 음악 서재

미니멀한 K-Pop의 네 가지 사례

2020.08.07
Special

미니멀한 K-Pop의 네 가지 사례

맥시멀리즘은 K-Pop을 대표하는 성질인가? 최소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음악 매체 피치포크(Pitchfork)에 게재된 K-Pop에 대한 칼럼에서의 설명을 보자. "제대로만 된다면, K-Pop의 패키지 상품적 접근은 짧으면서도 흠잡을 곳 없는 종합 예술적 팝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결과물이든 그렇지 못한 결과물이든, 이것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감각 과부하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미국의 뉴스 매체 복스(Vox)는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K-Pop은 엄청나게 캐치한 음악, 화려하기 그지없는 뮤직비디오, 그리고 정교한 콘셉트 미학으로 유명하다. 이 모든 요소는 안무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K-Pop에는 사람의 귀와 눈을 핑핑 돌게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료들이 음악과 비디오 속에 하나로 통합되어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공유하는 특성이다. 우리가 아무리 여기에 익숙해졌다 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https://pitchfork.com/features/starter/9475-20-essential-k-pop-songs/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미니멀함"을 콘셉트나 음악 등에서 주요한 방향성으로 설정한 곡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더 화려한 비주얼, 더 역동적이고 짜임새 있는 군무, 더 번쩍거리는 사운드… "더"를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인 것일까?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번 글에서 소개하는 곡들도 진정한 의미의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다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우리는 통기타 하나만 들고 올라와 노래를 부르는 타이틀곡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일반적인 K-Pop의 경향에 비해 "더"보다 "덜"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을 느슨한 "미니멀함"의 기준으로 삼아, 빼기에 집중한 네 개의 트랙을 소개한다.

글ㅣ정구원 (웹진웨이브 편집장)
사진 출처ㅣPitchfork 홈페이지, 레드벨벳 공식홈페이지


# f(x) '4 Walls'

f(x)의 '4 Walls'가 K-Pop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지만, 거기에 굳이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SHINee의 'View'와 더불어) "딥 하우스, 혹은 UK 개러지라는 장르를 아이돌 팝의 문법으로 전이시킨 것"이라 말하고 싶다. 이는 일차적으로 클럽 씬에 특화된 딥 하우스 음악을 (보다 명료한 구조와 강화된 훅을 통해) 팝송의 영역으로 부드럽게 옮겨 왔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이돌 팝 음악에서 미니멀함을 실현하기 위한 통로로서 딥 하우스라는 장르를 성공적으로 소개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LDN Noise가 만들어 낸 안개처럼 일렁이는 신시사이저와 공기방울처럼 가벼운 비트는 딥 하우스를 익히 들었던 사람이라면 익숙한 요소지만, f(x)는 그 요소들을 "K-Pop스럽게" 맥시멈한 방향으로 개조하는 대신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감각을 그대로 살려내는 방향을 택한다. 그 결과, 우리는 K-Pop에서 미니멀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몇 안 되는 "확정된" 경로를 가지게 되었다. EXID나('Too Good To Me') 공원소녀가('Puzzle Moon') 딥 하우스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미니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마 f(x)가 마지막 앨범에서 멋진 결과물로써 이것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미니멀한 팝을 사랑하는, 그리고 시도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4 Walls'는 앞으로도 길이길이 남아 있을 구심점이 될 것이다.

# 엠블랙 '스모키걸 (Smoky Girl)'

한창 모터를 돌리고 나서 대기 상태에 들어간 발전기처럼 웅웅거리는 저음 위로 날렵하게 포인트를 찍고 가는 짧은 전자음들. 슈트로 온 몸을 감싸고 다리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강조한 안무를 추며 고음 한 번 지르지 않고 전자음에 녹아들 듯이 노래를 부르는 멤버들. 미니멀리즘이 "긴장감"을 발산하는 데 최적화된 형식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스모키걸′은 그것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는 K-Pop 트랙 중 하나다. Zion.T와 프라이머리 특유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 프로덕션, 최소한의 요소를 통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은 곡이 끝난 뒤에도 여운을 진하게 남긴다.

그래서 '스모키걸'은 이질적인 노래다. 엠블랙의 디스코그래피는 물론이고, 이 곡이 발표된 2013년 당시까지의 K-Pop 씬을 살펴봐도 익숙하다 느껴질 법한 요소(파워풀한 랩, 고음 셔틀링, 뽕끼 있는 후렴구)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분위기만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이 시간이 지날수록 시대를 뛰어넘은 세련미를 보여줬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빅스('향')나 SF9('Good Guy')처럼 슈트를 차려입고 절제된 미감을 콘셉트로 내세우는 아이돌을 접할 때마다, 나는 2013년의 엠블랙과 '스모키걸'을 떠올린다. 이들이 이 콘셉트를 좀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하면서.

# Red Velvet 'Automatic'

Red Velvet은 미니멀함이라는 가치를 자신의 주요한 아이덴티티 중 하나로 삼는, 어떻게 보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그룹이다. 물론 활동 때마다 콘셉트를 달리 하는 것이 문법이 된 K-Pop의 상황을 감안해야 하는 판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싱글인 ′Be Natural′부터 가장 최근 등장한 아이린&슬기 유닛의 ′놀이 (Naughty)′에 이르기까지 절제된 안무와 우아하게 다듬어진 사운드를 내세운 싱글을 커리어 내내 간헐적으로 유지하면서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내세운 아이돌은 Red Velvet 말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주 작은 몸짓에 감각들이 움직여"라고 노래하는 ′Automatic′의 가사는, 그러므로 Red Velvet만의 미니멀함을 대표하는 하나의 선언이 된다.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R&B풍 선율 속에서 각자의 감정을 세밀하게 드러내는 듯한 목소리를 풀어놓는 멤버들의 모습은 Red Velvet만이 가진 매력적인 차분함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Red Velvet이 "다른 아이돌과 뭔가 다르다"(혹은 나원영 에디터의 분석처럼 "불안정함과 불확실함"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빨간 맛′이나 ′Ice Cream Cake′ 같은 활동적인 트랙 못지않게 작은 몸짓, 작은 사운드, 작은 포인트에 초점을 맞춘 ′Automatic′ 같은 트랙을 소화할 수 있는 그룹이기 때문일 것이다.

# 오마이걸 ′Dolphin′

K-Pop 내에서 미니멀리즘은 보통 단조 멜로디, 절제된 안무, 우아한 콘셉트 등과 동반되면서 그룹에 "성숙한" 느낌을 부여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런 공식에 굳이 구애받지 않고 상큼함, 귀여움 등의 밝은 느낌, 혹은 일상적인 감상을 전달하는 트랙에도 미니멀한 곡 구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보이고 있다. EXID의 '낮보다는 밤', 아이유의 '팔레트'와 '삐삐' 등은 그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세븐틴의 '어쩌나'와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Blue Orangeade' 등도 남성 그룹 특유의 꽉 찬 느낌보다는 "미니멀한 화려함"이 느껴지는, 힘을 뺀 트랙이다.

오마이걸의 'Dolphin'은 이 같은 흐름을 타고 뺄 수 있는 군더더기를 모두 제거한 결과물이 K-Pop 안에서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타이틀곡도 아니고, 뮤직비디오도 이미 촬영했던 뮤직비디오들의 B컷을 재편집했고, 장식음들을 모두 소거한 채 훅의 뼈대만 남기려는 듯이 적은 소리로만 차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또 물보라를 일으켜"라 흥얼거리면서 틈이 날 때마다 뮤직비디오를 다시 재생한다. 아마 이 곡을 좋아하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Dolphin'은 현재로서는 K-Pop 미니멀리즘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있는 트랙이다. 이 다음에 미니멀한 K-Pop이 뺄 수 있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연관 아티스트

연관 아티스트

연관 아티스트

연관 아티스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