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 몽상가 슈만을 마주하다.

장르 인사이드

백건우, 몽상가 슈만을 마주하다.

2020.09.22
Special

백건우, 몽상가 슈만을 마주하다.

1946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서울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이런 백건우를 두고 흔히들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피아니스트"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백건우보다 훨씬 윗세대 중에서도 피아노를 공부하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한국인 연주자들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가깝게는 백건우보다 5살 위이자 천재 피아니스트로 각광받았던 한동일도 있죠.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오로지 연주만을 하며 사는 이른바 프로페셔널 연주자의 모습을 기준으로 한다면 백건우를 "1세대"라고 표현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특히 70대 중반의 나이인 지금까지도 꾸준히 새로운 음반을 녹음하고 콘서트홀에 오르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는 백건우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죠. 조금은 식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백건우는 후배 피아니스트들에게 큰 귀감이 되는 그런 연주자인 셈이죠.

최근 백건우의 시선은 슈만을 향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슈만은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19세기 서양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죠. 또한, 낭만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에게는 필수적인 피아노 작품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 볼까요? 사실 낭만주의 음악은 얼핏 생각한다면 "낭만"이라는 단어 때문에 어쩐지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낭만주의 음악은 마냥 예쁜 것이라기보다는 작곡가 내면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녹아있는 음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또한, 동시대의 문학, 미술이나 자연 등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죠.

독일의 화가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위의 방랑자"는 바로 이런 낭만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림 속 바다를 뿌옇게 뒤덮은 해무와 그것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은 인간의 내면세계와 자연의 경이로움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죠.

"안개 위의 방랑자"를 보고 난 뒤라면 그 누구라도 백건우의 이번 앨범이 바로 이 그림을 오마주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백건우의 뒷모습이 담긴 표지는 구도와 색감 모두 위의 그림과 매우 닮아있죠. 한편, 앨범의 구성 역시 "안개 위의 방랑자"가 담고 있는 낭만주의적 감성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습니다.

곡리스트 29

첫 번째 CD에는 몽상가적 기질을 지녔던 슈만이 상상한 가상의 인물 "오이제비우스"를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베크 변주곡'[숲속의 정경], [어린이의 정경] 등은 내성적이며 온화하지만 어쩐지 우울하기도 한 "오이제비우스"를 꼭 닮아있죠.

반면, 두 번째 수록된 CD에는 [환상작품집], '아라베스크', '나비' 등은 열정적이며 자유롭지만 때로는 착란에 가까운 슈만의 또 다른 자아 "플로레스탄"을 닮았습니다. 이처럼 슈만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많은 감정과 생각을 음악으로 풀어냈고, 백건우는 이 앨범을 통해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과연 백건우는 슈만의 작품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혹 어느새 70대 중반의 다다른 자신의 인생을 슈만에게 투영하지는 않았을까요? 때로는 아이처럼 순수한 몽상을 거듭하다가도 때로는 고통스러운 고민과 번민에 울부짖기도 하는 슈만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백건우가 연주하는 슈만 역시 지극히 인간적이고 관조적입니다. 젊은 연주자들의 관점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몽상가 슈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Album

백건우 [슈만]

Schumann

곡리스트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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