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Thelonious Monk : 로큰롤 시대를 맞이한 모던재즈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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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Thelonious Monk : 로큰롤 시대를 맞이한 모던재즈의 천재

2020.11.09
Special

석양의 Thelonious Monk : 로큰롤 시대를 맞이한 모던재즈의 천재

최근 Thelonious Monk(1917~1982)의 미공개 녹음 한 편이 음반으로 발매되었습니다. 1968년 10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시에 위치한 팰로앨토 고등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Thelonious Monk Quartet의 음악회를 담은 앨범 [PaloAlto]입니다. Charlie Rouse(테너 색소폰), T. Monk(피아노), Larry Gales(베이스), Ben Riley(드럼)로 짜인 전설의 Monk 4중주단의 연주입니다.

재즈의 거장 Thelonious Monk가 고등학교 강당에서 연주했다는 사실도 특별하지만 현재는 미국 서부지역의 베테랑 공연 기획자로 널리 알려진 Danny Scher가 팰로앨토 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재학하고 있던 당시에 이 공연을 기획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당시 Thelonious Monk는 고등학교에서 한낮에 왜 연주회를 가졌던 것일까요? 이날 Monk 사중주단의 연주는, 그리고 이 무렵, `60년대 말에 Monk의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번 회는 이점을 음악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Thelonious Monk는 1962년 미국의 메이저 음반사인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은 Monk가 오랜 무명 생활을 벗어나 비로소 그의 음악을 온전히 평가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비밥의 개척자로 모던재즈의 출발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그였지만 그 안에서도 전위적이고 기이했던 그의 음악은 그의 동료였던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와 달리 오랫동안 외면받았고 특히 `50년대 전반기까지 그는 어두운 동굴 안에 칩거한 은둔자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50년대 후반부터 그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급기야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으면서 1964년에 그는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은 재즈 음악인으로 Louis Armstrong, Duke Ellington, Dave Brubeck 이후 네 번째의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재즈 음악들이 겪었던 것처럼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Monk 활동은 급격한 위축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64년에 시작된 Beatles의 인기를 기점으로 미국에서의 영국 록의 인기는 재즈 연주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1957년에 Elvis Presley의 출현으로 시작된 로큰롤의 "1차 침공"이 벌어졌을 때 재즈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Frank Sinatra, Nat "King" Cole로 대표되는 (재즈에서 갈려 나온) 스탠더드 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큰롤은 지속적으로 진화하여 기타리스트들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펼치자(Jimi Hendrix와 The Cream 등은 대표적인 연주자들이었습니다) 이 영역을 자신의 독점 영역으로 여기고 있던 재즈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로큰롤의 "2차 침공"에서 제일 먼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자신의 음악에 빠져있던 뮤지션보다는 이 음악을 홍보하고 판매해야 하는 음반사들이었습니다. `67년부터 녹음을 시작해 이듬해에 발표한 Monk의 앨범 [Underground]가 나왔을 때 컬럼비아 레코드의 스태프들은 이 음악을 어떻게 "로큰롤 세대"에게 판매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재즈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저항적인 이미지"를 생각했고 그래서 나치 장교를 생포에 지하실에 감금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Thelonious Monk의 이미지를 만들어 앨범 커버에 싣게 된 것입니다(이 앨범커버는 그래미를 수상했습니다). 훗날 평론가 Peter Keepnews가 지적한 대로, 현재로서는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컬럼비아 레코드는 Monk의 음악이 아닌 앨범커버에 초점을 맞춰 [Underground]를 홍보했습니다. 'Ugly Beauty', 'Raise Four','Boo Boo's Birthday', 'Green Chimneys'와 같은 Monk의 새로운 명곡들이 이 앨범을 통해 발표되었는데도 말이죠. 이 앨범은 작곡가로서의 Monk의 역량이 마지막으로 꽃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onk 앨범의 판매량은 1965년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컬럼비아 레코드는 Monk에게 미리 지불했던 로열티 금액을 삭감했고 Monk는 미리 받았던 로열티 금액을 음반 판매를 통해 갚아 나아가야 하는 경제적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국세청에 납부하지 못한 세금까지 남아있어서 그의 수입은 그의 손에 도달하기 이전에 대부분 미리 떼어져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더욱 심각했던 것은 Monk의 건강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의학으로서는 명백하게 특정할 수 없었던 Monk의 정신병(오늘날의 의학은 Monk의질환을 자폐증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이 악화되면서 `67년부터 그는 학생과의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모든 피아노 레슨을 중단했고 급기야는 `68년 5월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일로 예정되어 있던 녹음 일정이 모두 취소되자 컬럼비아 레코드는 야박하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 스튜디오 임대 때문에 생긴 손해비용을 Monk에게 청구하게 됩니다.

오랜 매니저였던 Harry Colomby가 Monk 곁을 잠시 떠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Harry는 Monk와 컬럼비아 레코드의 계약을 성사시켰고 `60년대 전반기 Monk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훌륭한 조력자였습니다. 하지만 원래 시나리오 작가였고 영화제작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결국 `67년 7월 할리우드에 머물게 되면서 Monk의 매니지먼트를 동생인 Jules Colomby에게 맡기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Jules는 아티스트 매니저로서의 경험이 거의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Monk는 `68년 가을, 슐리츠 양조회사의 후원으로 9주 동안 21개의 도시에서 진행되는 시리즈 콘서트 "슐리츠, 재즈를 경배하다"에 참여하게 됩니다(여기에는 Dionne Warwick, Cannonball Adderley, Herbie Mann, JimmySmith, Gary Burton, Miriam Makeba, Hugh Masekela 등 일급 재즈 연주자들이 참가 아티스트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기획에서 Monk는 그가 즐겨 연주했던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재즈 워크숍"에서 10월 22일부터 2주간 연주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팰로앨토의 한 고등학생(Danny Scher)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Jules Colomby는 낮 시간을 이용해 고등학교에서의 공연 일정을 잡았던 것입니다. 당시 Monk 4중주단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팰로앨토까지의 왕복차량을 제공받는다는 조건으로 출연료 500달러에 계약했는데 오늘날 한화로 환산한다면 약 400만 원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추측이지만 팰로앨토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Monk 4중주단의 연주회는 다음 두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성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곤궁에 처한 Monk의 경제적 상황. 둘째, 그다지 경험이 없었던 새로운 매니저 Jules Colomby. 만약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이라도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거장 Thelonious Monk가 한낮에 고등학교 강당에서 연주하는 색다른 풍경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당시 피아노 의자는 거구의 몸을 흔들며 연주하는 Monk의 체중에 계속 삐거덕거리는 신음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대가 어디였든 Monk 4중주단이 최고의 기량으로 최선의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인상적입니다. Monk의 피아노 연주는 바로 얼마 전 심각한 정신 이상으로 그가 병원에 있었다는 흔적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활기로 가득 차 있으며 나머지 4중주단 멤버들의 연주 역시 빈틈없는 팀워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비공식적인 녹음에서 음질 문제만이 해결됐다면 이 앨범 [Palo Alto]는 1963~`64년도에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녹음한 일련의 실황앨범, [Monk in Tokyo], [Live at the It Club], [Live at the Jazz Workshop]과 충분히 견줄만한 음반이었을 것입니다. `68년 Monk는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

이 시기 Monk는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연주 일정을 잡아 캘리포니아주에서 6주 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컬럼비아 레코드는 이미 Monk의 후속작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앨범을 놓고서 프로듀서 Teo Macero는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60년대 후반 Monk의 음악은 대중들로부터 외면받았던 것뿐만 아니라 변화가 거의 없다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도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Monk가 아직 대중들로부터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1960년, 재즈 전문지 "다운비트"의 비평가 투표에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했던 Thelonious Monk는 `68년 같은 투표에서 Earl Hines, Bill Evans, Oscar Peterson, Cecil Taylor, Herbie Hancock에 이어 6위에 머물러 있던 상태였습니다. 컬럼비아와의 계약상 이제 마지막 앨범이 될 이번 앨범에서 Monk를 아꼈던 프로듀서 Teo Macero는 상업적인 성공과 평단의 호의적인 평가를 모두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Monk에게 제안했던 것은 Monk와 이전에는 한 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는 명 편곡자 Oliver Nelson에게 편곡과 지휘를 맡긴 빅밴드 앨범이었습니다. 곡목들은 대부분 Monk가 기존에 발표했던 명곡들이었으며 이 제안을 Monk는 수락하게 됩니다.

Monk는 이전에도 빅밴드 편성의 앨범을 녹음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HallOverton에게 편곡을 의뢰했던 Monk가 선호한 이전의 빅밴드는 10인조 편성의 비교적 작은 규모였던데 반해 Nelson이 편곡을 담당한 `68년 빅밴드는 16인조의 풀 빅밴드로 Monk에게는 매우 생소한 사운드였습니다(물론 이 빅밴드에는 그의 사중주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앨범 [Monk's Blues]를 들어보면 확실히 Oliver Nelson의 편곡은 Monk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Monk 음악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음의 여백을 모두 채워버린 Nelson의 정교한 편곡은 Monk가 구사해온 음의 돌출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고 윤기가 흐르는 빅밴드 사운드는 지하실에 은거하고 있는 전위주의자에게 갑자기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힌 것 같은 느낌마저 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일각에서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았던 Monk의 피아노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Monk는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할 수 있지 스탠더드 넘버는 연주할 수 없다", "Monk는 자신의 사중주단과 연주할 수 있을 뿐 다른 연주자, 다른 편성과는 연주할 수 없다"는 추측들은 그러한 생각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종의 "피아노 협주곡"인 이 앨범에서 Monk는 빅밴드와 경쟁하며 또는 조화하면 독주자로서의 자신의 기량을 그 어느 앨범에서보다 명확히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미 건강에 이상이 온 Monk가 녹음 과정에서 Oliver Nelson과 겪었던 의사소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다했던 것입니다. 비록 이 앨범에 관한 평단의 반응은 가혹했지만 아마도 Monk의 팬이라면 이 앨범에서 발견한 Monk의 이면에서 음악적 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Monk's Blues]는 판매와 평론의 반응 양쪽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Teo Macero는 Monk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남겨두었습니다. [Monk's Blues]를 녹음하기 전 블루스 기타리스트 겸 가수 Taj Mahal(당시 그는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습니다)은 자신이 존경하는 Thelonious Monk와 함께 녹음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컬럼비아 레코드에 전했던 것입니다. Macero는 이 제안을 Monk에게 전했지만 Monk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Monk's Blues] 이후 Macero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역시 당시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은 재즈-록 밴드 Blood Sweat & Tears와 Monk가 함께 연주하는 음반이었습니다. 특히 이 밴드의 드러머 Bobby Colomby는 Monk의 매니저 Harry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의 성사 가능성은 높아 보였습니다. Macero는 3,500달러의 레코딩 세션 비용(오늘날 약 2,800만 원)을 마련해 놓고 디자인 부서에게 "사이키델릭 스타일의 확 가는" 커버를 디자인하라고 주문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Monk는 이 제안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Monk는 한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내 Nellie는 이런 음악을 들으면 위통을 일으켜요." 당시 한 음악 평론가와의 대화에서도 Monk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새로운 음악은 누군가가 하게 하세요. 난 내 음악을 할 겁니다."

`53년부터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었던 Dave Brubeck은 `67년에 결국 이 레이블을 떠났고 `55년에 컬럼비아와 작업을 시작한 Miles Davis만이 새로운 록 사운드를 받아들이며 `69년 [In a Silent Way]를 녹음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Monk는 컬럼비아와의 연장 계약을 포기하고 예정되어 있었던 유럽투어의 길에 오릅니다. 이제 4중주단 멤버 가운데 Larry Gales와 Ben Riley도 곁을 떠났고 오로지 CharlesRouse만이 곁을 지켰지만 Monk는 `69년 12월 15일 파리 살 플레옐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기이한 불협화음과 함께 열렬히 연주했습니다.

이후 13년의 여생 동안 Monk는 Dizzy Gillespie, Art Blakey 등과 함께한 [Giantsof Jazz] 그리고 영국 블랙 라이언 레코드와 녹음한 석 장의 앨범만을 공식적으로 녹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Monk에게 아쉬움을 느끼겠지만 어떤 Monk의 팬들은 그러한 시도에 응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Monk는 자신의 음악을 Monk's Music으로 남겼던 것이니까요. Miles와 같은 변신의 귀재도 있지만 한 편으로 변화의 시대에 조용히 물러섰던 모던재즈 시대의 천재도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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