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e Brubeck 100년: 그가 재즈에게 남겨 놓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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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e Brubeck 100년: 그가 재즈에게 남겨 놓은 것들

2020.11.23
Special

Dave Brubeck 100년: 그가 재즈에게 남겨 놓은 것들

지난 2012년 12월 5일, 자신의 아흔두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재즈 음악인 Dave Brubeck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 타임스"의 부고 제목은 "독창적인 사운드로 재즈에게 새로운 인기를 선사했던" 인물이라고 그를 표현했습니다. "재즈에게 새로운 인기를 선사했다"는 표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렇습니다. Dave Brubeck Quartet의 색소포니스트 Paul Desmond가 작곡하고 D. Brubeck Quartet이 연주한 1959년 작 'Take Five'는 재즈에서는 보기 드물게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5위에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곡은 지금까지도 재즈 연주자들이 즐겨 연주하는 명곡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재즈곡이 빌보드 싱글차트에 등장한 예들은 몇몇이 더 있습니다. 1964년에 Louis Armstrong의 'Hello Dolly!'(1위), Stan Getz와 Joao Gilberto의 'The Girl from Ipanema'(5위), 1977년 Chuck Mangione의 'Feels So Good'(4위), 1981년 Grover Washington Jr.의 'Just Two of Us'(2위) 등입니다. 하지만 이 곡들과 'Take Five'의 성격은 조금 다릅니다. 위의 곡들은 녹음 당시부터 싱글 순위에 오를 것을 예상하고서 싱글 음반으로 발매한 곡들이었던 것에 반해 'Take Five'는 이 곡을 수록한 앨범 [Time Out] 발매 1년 뒤에 예상치 못했던 인기로 뒤늦게 싱글로 발매한 "연주곡"이란 점입니다(물론 위의 곡들 가운데 'Feels So Good'도 연주곡입니다만). 그리고 이 곡들 가운데 재즈 스탠더드 넘버가 된 것은 'Take Five'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Dave Brubeck이 재즈에게 남긴 것은 인기 스탠더드 넘버 'Take Five'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재즈의 선구자였고 그가 시도했던 것들은 오늘날 재즈 문화, 재즈 산업 그리고 재즈 그 자체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는 12월 6일 Dave Brubeck의 100번째 생일을 앞두고 그가 재즈에 남긴 유산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1961년과 '64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된 Dave Brubeck Quartet의 대표곡들입니다.

재즈란 음악의 주 무대는 역시 재즈클럽입니다. 최근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이전만큼 활발하지는 못하지만 재즈는 이 음악이 탄생한 이래로 크고 작은 재즈클럽에서, 매일 밤 연주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재즈가 재즈클럽이 아닌 콘서트홀, 학교 강당, 미술관 등에서 연주된다고 한들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은 오늘날 없습니다. 재즈 팬들의 숫자는 다른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반면에 재즈처럼 광범위한 영역에서 연주될 수 있는 음악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과 인식은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즈는 재즈클럽, 다시 말해 알코올을 취급하는 장소의 "술집 음악"이고 그 영역 밖에서 연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각에 처음으로 도전한 사람은 Benny Goodman이었습니다. 그는 1938년 미국 음악의 중심지 카네기홀에서 재즈 음악회를 열어서 재즈가 음악당에서 충분히 연주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점을 입증했습니다. Duke Ellington은 1943년부터 '47년까지('45년을 제외하고) 매해 카네기홀에서 정기 연주회를 가졌고 "에스콰이어"지는 올스타 재즈밴드를 결성해 '4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주회를 개최했습니다. Louis Armstrong 역시 '47년 뉴욕 타운홀,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연주회를 시작으로 콘서트홀에서의 연주회를 평생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몇몇 공연을 통해서 재즈에 대한 인식이 금세 바뀌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즈가 감상 음악으로 음악당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란 인식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는데 그 인식의 변화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은 Dave Brubeck이었습니다. '51년 자신의 사중주단을 결성한 그는 '53년부터 오버린 대학('These Foolish Things', 'Perdido'), 칼리지 오브 퍼시픽('All the Things You Are', 'For All We Know', 'How High the Moon', 'Stardust'), 미시건 대학('Balcony Rock', 'Out of Nowhere') 등 미국 전역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공연을 가졌고 이를 반드시 음반으로 발표하면서 재즈의 가치를 알리고 이를 젊은 음악 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오랜 세월 꾸준히 해왔던 것입니다.

'62년 Dave Brubeck은 미국 백악관이 주최한 음악회(당시 대통령은 나이 40대의 젊은 John F. Kennedy였습니다)에 초대받아 달라진 재즈의 위상을 보여줬으며 '63년 카네기홀에서 자신의 라이브 앨범을 녹음하게 됩니다. 이 앨범은 Benny Goodman의 음악회가 있은 지 25년 만의 녹음이었으며 Dave Brubeck 개인의 성장인 동시에 재즈 자체의 발전이기도 했습니다.

Dave Brubeck의 역할은 단지 미국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1956년부터 대표적인 재즈 음악인들이 세계 무대에서 연주하면서 재즈를 전 세계에 알리는 "재즈 친선대사(Jazz Ambassador)"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Louis Armstrong, Duke Ellington, Benny Goodman, Jack Teagarden, Benny Carter, Lionel Hampton, Woody Herman, Dizzy Gillespie, Clark Terry 등 당대 최고의 재즈 연주자들이 참여했는데 여기에 Dave Brubeck 역시 이름을 올렸습니다.

Brubeck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주했을 뿐만이 아니라 덴마크, 네덜란드, 멕시코, 독일에서의 실황을 녹음해서 음반으로 발매했고 유라시아 대륙과 일본 등지에서 얻은 인상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재즈가 전 세계에 확산 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세계 음악을 통해 Brubeck의 음악이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Brubeck의 작품 제목('The Real Ambassador') 그대로 당시의 재즈 음악인들이야말로 정치인들이 해낼 수 없는 역할을 해냈던 진정한 친선대사였던 것입니다.

Dave Brubeck의 음악이 콘서트홀 무대에서 그리고 세계 각국의 무대에서 환영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음악이 클래식 음악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중주단이 들려주는 안정되고 섬세한 사운드는 콘서트홀 음악팬들 혹은 유럽과 세계 각지의 음악팬들에게 재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던 것입니다.

Brubeck은 칼리지 오브 퍼시픽에서 음악을 전공하면서 클래식 피아노를 연마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초견(初見)으로 연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여기에는 그의 나쁜 시력도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하고 2차 세계대전 때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군악대에서 그의 밴드의 핵심 멤버 Paul Desmond(알토 색소폰)를 만나게 되었고 군악대 활동 안에서 악보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재즈를 익히기 시작합니다.

Brubeck은 제대 후 밀스 칼리지에서 클래식 작곡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 학교에는 재즈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 작곡가 Darius Milhaud가 교수로 재직 중에 있었습니다. Brubeck은 Milhaud로부터 대위법과 관현악법을 배우고 동시에 자신이 익힌 재즈의 연주방식을 스승에게 가르쳐 주면서 그의 음악적 안목을 넓혀가게 됩니다. 아마도 그러한 Brubeck의 음악적 과정이 없었다면 '60년대의 앨범 [Brandenburg Gate Revisited]와 [Time Changes]와 같은 관현악 편성의 작품들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Brubeck의 음악은 단지 형식적으로 두 음악을 엮은 것이 아니라 재즈, 클래식 모두 자신의 음악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그 접점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지금도 더 많은 평가가 있어야 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Dave Brubeck이 "재즈 친선대사"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얻었던 음악적 소득은 리듬에 대한 넓은 안목을 가졌던 점입니다. 그는 터키 연주 여행 중 그곳의 음악이 일반적인 유럽의 4/4박자에서 벗어나 9/8박자가 널리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그 리듬을 재즈에 곧장 인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Blue Rondo a La Turk'였습니다. 이 곡을 담은 앨범 [Time Out]은 5/4박자의 곡 'Take Five', 3/4박자와 4/4박자를 번갈아 가며 연주하는 'Three to Get Ready' 등 일반적인 4/4박자에서 벗어난 곡들만을 담은 실험적인 앨범이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Take Five'는 히트곡이 되었고 그 여세로 Dave Brubeck은 다양한 박자의 실험을 여러 앨범을 통해 이어가게 됩니다. 'Maori Blues'(6/4박자), 'Unsquare Dance'(7/4박자), 'Countdown'(10/8박자), 'Eleven Four'(11/8박자) 모두가 이러한 창의적인 아이디어 속에서 탄생한 곡들입니다.

이러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연주 실력의 멤버들이 필요했는데 군악대의 동료였으며 1951년 Dave Brubeck 사중주단의 창단 멤버였던 Paul Desmond를 시작으로 드러머 Joe Morello('56년 입단), 베이시스트 Eugene Wright('58년 입단)의 진영이 갖춰지면서 Brubeck Quartet은 아무리 복잡한 리듬도 완벽하게 연주해 낼 수 있는 독보적인 능력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중주단은 '67년까지 멤버 변동 없이 함께 연주했고 당대의 최고 재즈밴드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아울러 오늘날에 있어서 홀수박자의 리듬, 연주 도중에 박자에 변화를 주는 것은 재즈의 일반적인 기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은 Dave Brubeck Quartet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Dave Brubeck은 그 어떤 재즈 음악인들보다도 안정되고 성공적인 활동을 평생 이어갔습니다. 1952년 판타지 레코드를 시작으로 컬럼비아(이 메이저 음반사와는 무려 14년 동안 음반을 녹음했습니다), 데카, 애틀랜틱, A&M, 콩코드, 텔락 등 안정된 음반사들과 평생 녹음을 남겼고 프로듀서이자 지휘자였던 Russel Gloyd는 36년 동안 그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그의 안정된 음악 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는 작사가인 Iola Brubeck과 1942년에 결혼해 평생을 함께 하면서 여러 작품들을 함께 만들었고 여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을 자신의 대를 잇는 직업 음악가로 키워냈습니다. 생전에 그와 교분을 나눴던 재즈 평론가 Ted Gioia는 Brubeck에 대해 "늘 가족을 돌봤던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이었고 연예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음악적인 시련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좋지 않은 시력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였고 1951년에 입은 척추 부상은 그의 원활한 핑거링에 장애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Louis Armstrong에 이어서 재즈 음악인으로는 두 번째로 "타임"의 표지 인물이 되었고('54년)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으면서 연주 투어에 나서고 대형 음반사를 통해 'Take Five'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한 만큼 그와 그의 밴드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판은 늘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는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악, 그만이 갖고 있는 음악적 미덕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속한 웨스트코스트 재즈는 스윙할 줄 모르고 소울이 없다는 평가에서 Brubeck은 결코 예외일 수 없었고 대학 강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의 투어, 홀수박자에 대한 탐닉 모두도 평론가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일관된 그의 방향은 쉽게 포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방식들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오늘날 재즈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였던 "강골의" Brubeck과 같은 예술가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재즈는 지금처럼 다채롭고 풍부한 음악적 유산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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