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에 폴란드의 영혼을 불어 넣은 아티스트, Krzysztof Kom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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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 폴란드의 영혼을 불어 넣은 아티스트, Krzysztof Komeda

2020.12.07
Special

재즈에 폴란드의 영혼을 불어 넣은 아티스트, Krzysztof Komeda

작곡가 Chopin을 비롯해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작곡가, 연주자들을 배출해온 폴란드는 재즈 분야에서도 강국으로 손꼽힙니다. Adam Makowicz, Leszek Mozdzer, Marcin Wasilewski(이상 피아노), Michal Urbaniak(색소폰, 바이올린), Anna Maria Jopek(보컬), 여기에 지난 2018년에 세상을 떠난 명인 Tomasz Stanko(트럼펫)까지, 유럽 재즈계에서 널리 알려진 이들이 모두 폴란드 출신의 재즈 음악인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폴란드 재즈 음악인들이 그들의 뿌리로 생각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Krzysztof Komeda(한글로 표기하자면 크시슈토프 코메다, 1931~1969). 현재 폴란드 재즈의 주역인 Leszek Mozdzer, Marcin Wasilewski, 폴란드 재즈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 Tomasz Stanko, Michal Urbaniak 모두가 Komeda를 기리며 그의 작품으로 앨범을 냈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단지 국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Komeda를 기억하고 기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Komeda는 오늘날 폴란드 재즈에게 무엇을 남긴 것일까요? 오늘은 그의 음악을 통해 폴란드 재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다음 세 곡은 Wasilewski(그의 The Simple Acoustic Trio), Stanko, Urbanik가 그들의 헌정음반을 통해 연주한 Komeda의 작품들입니다.

미국의 음악 재즈가 폴란드에 알려진 것은 대략 1930년대였습니다. 그 당시의 재즈였던 스윙은 미국 대중음악을 대표하고 있었고 그 인기로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었습니다(심지어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선에도 당시 스윙이 전파되었고 몇몇의 자생적인 재즈 녹음이 등장하기도 했으니까요). 1931년에 태어난 Komeda는 여덟 살 때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일찍이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 폴란드는 문화적 검열을 강화했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Komeda 역시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고 고교 졸업 후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 고등학교 동창인 베이스 연주자 Witold Kujawski를 만나 폴란드 남쪽에 있는 도시 크라코프에 있었던 Witold의 아파트에서 비밀리에 잼 세션을 시작하게 된 Komeda는 점점 재즈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이후 피아니스트 Andrzej Trzaskowski를 만나 새로운 재즈 비밥에 눈 뜬 그는 때마침 미국 정부에서 특히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향해 송출했던 라디오 방송 "미국의 목소리 (Voice of America)" 중에서 Willis Conover가 진행하는 "재즈아워"가 들려오자 재즈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대학 졸업 후 재즈 음악인으로서 활동하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본명인 Trzcinski 대신에 예명 Komeda를 스스로 만들게 됩니다.

1956년 대학 졸업 후 Komeda는 자신의 6중주단을 결성해서 폴란드 북부의 도시 소포트에서 열린 재즈 축제에 참가했는데 대부분 트래디셔널 재즈, 스윙 재즈 밴드만이 모였던 이 축제에서 Komeda 6중주단은 비밥을 연주한 유일한 모던재즈 밴드였습니다. 이 밴드를 폴란드 최초의 모던재즈 밴드라고 현재 평가하고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재즈 음악가로서의 Komeda의 꿈은 미국음악, 자본주의 음악을 금지했던 폴란드 정부의 강압으로 순탄하지 못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럼에도 Komeda에게 새로운 상황이 곧 벌어졌습니다. 1953년 Joseph Stalin의 사망 이후 Nikita Khrushchev가 1958년부터 소련의 권력을 잡고 서방 세계와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자 동유럽의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도 과거와 같은 강경한 문화 검열을 잠지 완화되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가 되자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문학, 음악, 영화에서 과거 완고한 사회주의 노선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분위기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폴란드 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했던 Andrzej Waida는 재즈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순진한 마법사"('60)를 발표했고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인물은 당연히 Komeda였습니다. 앞서 들었던 세 곡의 음악은 바로 "순진한 마법사"에 등장한 Komeda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훗날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폴란드 감독 Roman Polanski가 해외의 그의 이름을 알린 첫 작품 "물속의 칼"('62)에서도 Komeda의 음악은 강렬한 여운을 남겼고 이 무렵부터 그의 '발레 연습곡 1-4번'('63), Jerzy Skolimowski 감독의 "장벽", 유럽 재즈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 받은 Komeda의 대표 앨범 "Astigmatic"('66)을 발표까지 그의 재즈는 다른 어느 지역, 어느 음악인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그만의 색깔을 들려주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사회의 동경 그러면서도 제한적 자유를 누리고 있던 당시 Komeda를 비롯한 폴란드 음악가, 예술가들이 느끼고 있던 현실의 답답함, 미래의 불안을 담은 느낌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자유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64년 Khrushchev가 실각하자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제는 다시 강화되었고 제한적이나마 존재했던 표현의 자유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Komeda는 스웨덴, 덴마크, 서독 등 해외에서의 연주 일정을 점점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그의 동료였던 영화감독들 역시 해외에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Skolimowski 의 영화 "출발"('67)은 벨기에 제작사와 만든 영화로 이 영화에서의 음악 역시 Komeda가 맡았던 재즈풍의 사운드 트랙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Polanski 감독이 영국에서 만든 "막다른 골목"('66), "박쥐성의 무도회"('67)에서도 음악을 맡았던 Komeda는 이듬해에 Polanski와 함께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에 완성한 영화가 "로즈매리의 아기"('68, 일명 "악마의 씨")였습니다. Polanski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던 이 영화에서 Komeda의 인상적인 음악이 없었더라면 우울하면서도 불길한 이 영화의 분위기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영화 이상의 불길함이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가 개봉된 얼마 뒤인 '69년 8월 Polanski 감독의 가족에게 오늘날에도 회자 되는 처참한 사건(흔히 Charles Manson 사건이라고 불리는)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극은 우연히도 이미 몇 달 전에 벌이지고 있었습니다. '68년 12월 "로즈매리의 아기" 작업을 위해 미국 LA에 체류 중이던 Komeda는 사소한 사고로 머리를 다쳐 이듬해 4월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는 폴란드의 모던재즈 시대를 만들었으며 '60년대 폴란드 영화의 새로운 흐름 속에서 주옥 같은 음악을 만들었던 한 천재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맞이했던 황망한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Komeda의 타계 이후에도 그의 음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Komeda 밴드에서 활동했던 Michal Urbaniak(1962~'64)과 Tomasz Stanko('63~'67)는 Komeda의 음악을 새롭게 녹음하고 세상에 알리는데 선두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망한 Komeda 음악의 가치는 매우 분명합니다. 우선 Komeda는 미국 재즈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했습니다. 그의 피아노는 훌륭하게 스윙했으며 아름다운 음색을 가졌고 유려한 즉흥성을 자랑했습니다. 아울러 '50년대 이후로 모든 재즈의 사조를 압축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프리재즈마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불협화음을 영화 음악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용했던 미국의 음악 재즈가 하나의 그릇이라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폴란드의 음악이었고 더 나아가 Komeda 개인의 음악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60년대 폴란드 음악가의 갈망과 불안, 에너지와 우울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재즈라는 음악이 아니라 새로움과 자유를 갈구했던 '60년대 폴란드의 목소리였으며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폴란드의 재즈는 사람들이 마시면서 즐기는 재즈 클럽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고 같은 시기에 인종 평등을 부르짖었던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인들의 목소리와도 일맥상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Komeda의 작품은 오늘날 폴란드 재즈의 중요한 레퍼토리로 남아 있으며 그 자양분은 폴란드 재즈가 그들만의 독특한 빛깔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재료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서울 아트시네마에서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상영하는 "폴란드 영화제"에서는 Komeda가 음악을 맡은 "순진한 마법사"와 "장벽"을 상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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