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소리를 붙잡다 - 양인모의 [현의 유전학]

장르 인사이드

사라지는 소리를 붙잡다 - 양인모의 [현의 유전학]

2021.03.09
Special

사라지는 소리를 붙잡다 - 양인모의 [현의 유전학]

이처럼 확실한 시작도 없었습니다. 지난 2015년, 양인모는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고향인 이탈리아 제네바에서 열리는 이 콩쿠르는 좀처럼 1위 수상자를 내지 않는 대회로도 유명합니다. 그런 대회에서 간만에 나온 1위 수상자였으니 양인모는 자연스럽게 파가니니의 대표작인 [카프리스]를 선택해 첫 앨범에 담았습니다.

확실한 시작 뒤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늘어선 가능성이 "파가니니 다음은 무엇이냐?"라고 집요하게 물어오는 가운데, 양인모는 자신도 놀랄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바이올린의 역사는 물론, 어쩌면 음악의 역사까지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들자. 양인모는 "우리에 대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앨범 [현의 유전학]을 설명합니다.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환경, 비록 수 세기 전에 완성된 음악이지만 멀리 있지 않은 그곳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소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리들을 거듭 되새겨야 한다.”

앨범은 첫 트랙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띄웁니다. 소프라노의 음성이 조심스럽게 떠오르고, 그 위로 바이올린 선율이 덧입혀집니다. 이윽고 선율은 선율이 아닌 파편처럼 흩어지며 음악이 아닌 물리적 현상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흔히 작품이 현존하는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 기록되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O ignis Spiritus paracliti'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양인모가 직접 작곡한 작품입니다. 작품이라기보다는 즉흥, 어쩌면 즉흥이라기보다는 물리적 현상을 재현하는 듯한 느낌의 이 곡은 앨범 [현의 유전학]이 지향하는 바가 어디인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음악이 깨어난 뒤로는 니콜라 마테이스의 작품 'Fantasia in A minor'가 연주됩니다. 자연스럽게 바흐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음악가들의 기술적 성취와 음악적 표현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를 알리는 훌륭한 지표입니다.

이어지는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소나타 라단조 "라 폴리아"'는 하프시코드, 첼로와 함께 연주하는 작품입니다. 이후 여러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화성 진행의 매력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음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바로크 시대를 거쳐오면 다시금 현의 긴장을 최대한 팽팽하게 당겨야 합니다.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Gypsy Melody'를 연주할 때 양인모는 현을 소프트한 거트현에서 쨍쨍한 소리를 내는 스틸 현으로 교체했습니다. 날것에 가까운 집시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연주 태도뿐만 아니라 물리적 환경의 변화까지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바로크와 낭만 사이에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음악가 요한 할보르센의 'Sabande con variazioni'는 헨델의 유명한 '사라방드'를 변주한 작품입니다. 헨델이 만들어낸 바로크 시대의 선율을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음악가 할보르센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변주들로 뒤를 채워 넣었고, 비올리스트 Richard Yongjae O'Neill (리처드 용재 오닐)이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여정에 동반해 함께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앞서 연주되었던 작품들이 시대를 넘나드는 느낌이라면 다음에 연주될 작품은 지역을 달리하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바이올린과 기타 듀오로 연주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의 역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무대로 연주되는 작품입니다. 이 머나먼 곳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함께 우리는 탱고가 전해주는 친근함과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 뒤로는 모리스 라벨의 '치간느'가 이어집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영원한 과제인 이 곡은 본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었습니다만 이후 작곡가 본인이 피아노 반주 부분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며 협연 무대에도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인모의 선택은 피아노도 오케스트라도 아닌 하프였습니다. 유려한 하프 소리를 타고 흐르는 바이올린 독주는 색다른 기분과 함께 이 작품이 여전히 '치간느'라는 오리지널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앨범의 마지막 작품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살바토레 샤리노의 '카프리치오 2번'입니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에 대한 머나먼 후배 작곡가의 대답이라 할 수 있는 샤리노의 '카프리치오 2번'은 마치 새소리처럼 미세하게 퍼져 나가는 현의 떨림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작품입니다. 감상하는 음악이 아닌, 경험으로서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앨범 끝자락에 새기기 좋은 샤리노의 '카프리치오 2번'과 함께 양인모[현의 유전학]의 그 장대한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Album

양인모 [현의 유전학]

현의 유전학

연관 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