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있었던 일 – Hilary Hahn의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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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있었던 일 – Hilary Hahn의 [Paris]

2021.03.16
Special

파리에서 있었던 일 – Hilary Hahn의 [Paris]

파리에 관해 간직한 나의 가장 찬란한 기억 중 하나는 십 대 시절, 투어를 하다가 샹젤리제 거리 바로 옆에 있는 호텔에 투숙했던 그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묵은 방은 꼭대기 층이었다. 나는 테이크 아웃 피자를 주문해서는 맑은 밤하늘이 펼쳐진 옥상으로 들고 올라가 주변을 둘러싼 경관을 음미하며 만찬을 즐겼다. 건너편에 위치한 집들의 창문마다 드리워져 있는 벨벳 커튼 너머를 훔쳐보기도 하고, 발밑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주고받는 프랑스어의 미묘한 울림을 엿들으며 환하게 빛나는 에펠탑이 한눈에 보이는 달빛 찬란한 지붕 위에 한참을 머물렀다.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 나는 파리에서의 삶을 꿈꾸게 되었고, 그 후로 매년 이 도시에 돌아왔다.

- Hilary Hahn(힐러리 한) -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다가오는 도시는 바이올리니스트 Hilary Hahn(힐러리 한)에게도 전에 없던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십 대 시절 처음 방문한 이래 파리는 연주 일정으로 매해 방문하는 도시가 되었지만 해가 지나도 이곳에서의 즐거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던 파리에서의 추억에 변화가 찾아왔으니...

변화는 지휘자 Mikko Franck(미코 프랑크)의 연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파리를 거점으로 하는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 핀란드 출신 지휘자가 힐러리 한을 2018-19년 시즌에 악단의 상주 음악가로 초청했던 것이죠. 평소 좋아하던 도시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오케스트라와의 협업을 진득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단순한 연주 여행이 아닌, 상주 음악가로 파리에 머물게 되었으니 특별한 기록도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로 "파리"라는 이름으로 한 장의 앨범을 묶는 일이었습니다.

작품이 수록된 작곡가는 물론,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그리고 독주자 자신까지, 힐러리 한의 새 앨범 [Paris]는 파리에 얽힌 음악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며 서로 다른 경험을 했던 음악가들의 이야기가 파리라는 이름 안에서 한자리에 묶일 때, 음악은 파리처럼 다가오게 됩니다.

앨범은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합니다. Ernest Chausson(에르네스트 쇼송)'시곡'이 작곡된 해는 1896년. 이 앨범에 작품을 수록한 3인 중 유일한 프랑스인이자 파리 출신인 쇼송은 작곡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부유한 인물이었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896년이 되자 '시곡'이 세상에 나왔고 쇼송은 거짓말처럼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시곡'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비가(Elegy)이기도 합니다. 작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모호한 가운데 독주를 맡은 바이올린이 조금씩 주변을 배회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스라이 퍼져 있는 시적 상태를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어갑니다.

두 번째로 연주하는 작품은 Sergei Prokofiev(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바이올린 협주곡 1번]입니다. 작품이 완성된 해는 1917년이었지만 초연은 그보다 6년이나 늦은 1923년에서야 이루어졌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불안정했던 고국의 상황 때문에 작곡가가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안정한 정세와는 별개로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누군가가 장난이라고 물어본다면 "나 장난 아닌데?"라고 진지하게 답하는 작품입니다. 짓궂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지극히 프로코피예프다운 작품을 힐러리 한은 칼같이 예리한 솜씨로 풀어냅니다.

마지막으로 연주되는 작품은 힐러리 한이 세계 초연하는 작품입니다. 핀란드 출신의 작곡가 Einojuhani Rautavaara(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의 작품 'Serenade pour mon amour''Serenade pour la vie'는 힐러리 한을 위해 작곡된 작품입니다. 본래 힐러리 한은 라우타바라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받아 연주할 계획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라우타바라는 201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추정되는 악보가 발견되었고, 라우타바라의 제자인 작곡가 Kalevi Aho(칼레비 아호)가 이를 최종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Serenade pour mon amour'는 맨 처음 연주되었던 쇼송의 '시곡'이 정제된 듯 들리며, 'Serenade pour la vie' 여기에 보다 활발한 느낌이 더해진 작품입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독창적인 시도들로 가득한 현대음악계에서 신비롭고 영적인 정신을 음악으로 구현했다는 평가받는 라우타바라의 음악세계를 가감 없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작곡가를 추모하는 마음과 함께 힐러리 한의 [Paris]는 매듭지어집니다.

Video

Hilary Hahn이 들려주는 두 개의 세레나데 탄생 스토리


Album

Hilary Hahn,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Mikko Franck [Paris]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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