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s 제이팝] 시부야계의 등장과 타이업 시스템

에디션m

[90s 제이팝] 시부야계의 등장과 타이업 시스템

2024.07.29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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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래를 뭐라고 하지?'
'이 노래는 어떻게 유행하게 됐을까?'


우린 종종 음악을 들으며 장르, 아티스트, 혹은 노래의 이면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궁금해하죠. 또는 최애곡과 비슷한 노래, 최애 밴드와 비슷한 가수에 목말라 하기도 하고요. 하나의 음악을 접하면 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게되는 독창적 탐구형 리스너를 위해, 멜론과 전문가가 힘을 모아 대중음악 지침서를 발행합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에디션m에서 즐겨보세요.

음악을 탐구하는 멜로너를 위한 대중음악 지침서, 에디션m

Story

전자음악 중심의 시부야계의 등장과 '타이업' 시스템으로 호황을 누린 OST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J-POP이라는 호칭은 사실 1990년대에 와서야 정착된 용어다.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확실한 기원이나 정의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 일본의 대중음악이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디지털 음악 제작 기술의 도입 덕분. 신시사이저나 시퀀서, 미디 등의 보급은 비용 절감과 동시에 속도감 있는 작업을 가능케 했다. 이와 함께 영미권의 트렌드가 대대적으로 도입되며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향이 출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가라오케의 보급과 타이업 시스템의 부각, 여기에 수입반 레코드점의 중심지로 불린 시부야까지 얽히고설키며 탄생한 음악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대륙으로 대중들을 인도했다.

시부야계가 왔다

1990년대 일본 대중음악 신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아무래도 시부야계일 것이다. 라이선스반으로 발매되지 않아 시장을 뒤져 빽판을 구해 듣던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상황은 굉장히 풍족했다. 여유로운 경제 상황으로 인해 이들은 여가를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선택지에서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려왔다. 이러한 흐름에서 다양한 음악에 대한 수요에 대응하고자 시부야를 중심으로 중고 레코드점과 수입반 CD 매장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서양의 조류와 일본의 팝 감각을 버무린 '키치함'으로 무장한 아티스트들이 선봉장으로 자리하며 시부야계를 발족시켰다.

이는 당시 유행이었던 '미야케 유지의 이카스 밴드 천국' 중심의 밴드 붐과는 선을 긋고 있던 흐름이었으며, 뉴웨이브 기타 팝과 네오 어쿠스틱, 하우스, 라운지 뮤직, 프렌치 팝이 어지러이 얽혀 있어 사실상 '서양음악을 디깅하는 이들의 큐레이션'의 경향을 띠던 것이 음악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모두가 모르는 소재를 찾아 발견해 자신만의 센스를 더해 과감하게 제시하는 감각이 중심이 된 만큼, 아티스트들에게 있어 '음악을 소개하는 역할'이 특히나 강조되던 신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플리퍼즈 기타와 피치카토 파이브, 오리지널 러브의 삼각편대를 중심으로, 일본의 음악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KDD, 1990년대 일본 대중음악의 키워드

밴드 오프 코스 출신의 오다 카즈마사는 1991년 솔로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드라마 '도쿄 러브스토리'의 주제가로 타이업 된 'ラブ・ストーリーは突然に'가 대히트하며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완수하게 된 것. 이 히트에서 당시 일본 음악 신의 핵심적인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데, 바로 가라오케(K), 드라마(D), 그리고 레코드사 비잉의 대표를 역임했던 프로듀서 나가토 다이코(長戸 大幸)의 이름을 딴 다이코 시스템(D)이 그것이다.

밴드 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10대였다. 그 외의 세대, 특히 20대 여성들은 당시 도시 남녀의 연애를 그린 트렌디한 드라마 주제가를 통해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ラブ・ストーリーは突然に', 차게 앤 아스카의 'SAY YES', 드림스 컴 트루의 'LOVE LOVE LOVE'와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명곡들이 탄생, '드라마 타이업'은 어느덧 영향력 있는 프로모션 전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 노래들은 가라오케의 보급에 발맞춰 '부르는 음악'에도 부합했고, 주제가를 풀버전으로 듣기 위해선 CD를 구매해야 했기에 음반 역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와 같은 '곡 단위' 소비의 정착은 싱글 판매량이 앨범을 넘어서는 계기로 되기도 했다.

신비주의와 타이업 전략의 수혜자, 비잉

하나 남은 D는 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작사 비잉의 대표 나가토 다이코를 일컫는 이니셜이다. 비잉은 여러모로 독자적인 시스템을 통해 대중음악 신의 강자로 거듭났는데, 그중 하나가 적극적인 타이업 기용이었다. 1990년 'ちびまる子ちゃん'의 'おどるポンポコリン'을 비롯해, 특히 1993년부터 1999년까지 TV 아사히의 저녁 시간대 여러 애니메이션 및 프로그램의 타이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어도 '명탐정 코난'의 주제가를 지금까지 도맡으며 마니아층을 확보 중인 쿠라키 마이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터.

비잉은 아마추어 밴드와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 보컬리스트를 선발해 철저히 프로듀서 주도로 결성된 멤버들과 합을 맞추도록 했다. 이 덕분에 비즈를 포함한 소속 뮤지션들은 활동하기 직전까지도 서로 전혀 알지 못했던 경우도 많았다. 아티스트 직접 제작에 매달리지 않고, 자체 크리에이터 풀을 두고 이들을 독점적으로 활용하며 '비잉계 음악'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다져 나갔다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비즈를 비롯해 자드, 완즈, 튜브, 티-볼란 등이 이른바 '비잉 붐'을 주도하였으며, 1993년 오리콘 종합 매출 차트에서는 1위와 2위, 4위, 5위, 10위를 휩쓸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코무로 테츠야가 주도한 프로듀서 전성시대

이전부터 프로듀서는 존재해 왔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레코드사의 직원으로서 묵묵히 제 일을 해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격변을 몰고 온 이가 바로 코무로 테츠야였다. 팝 본연의 성질에 충실한 전자음악을 추구해 가던 그는, 그 독보적인 음악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관계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비주얼적인 면을 강조해 엔터테인먼트로서 새 지평을 연 티엠 네트워크를 비롯해, 와타나베 미사토와 코이즈미 쿄코, 나카모리 아키나 등에게 곡을 제공하는 등 관계자로부터 일찌감치 많은 러브콜을 받던 상황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그는 앞서 언급한 가라오케의 보급에 발맞춰 '젊은이들이 가라오케에서 춤추며 노래할 수 있는' 스타일의 창작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음악들은 노래를 부르던, 춤을 추던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바로 티알에프(TRF)의 'EZ DO DANCE'와 'survival dAnce ~no no cry more'. 레이브와 제이팝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이 노래들은 디스코와 가라오케 사이의 미개척 시장을 노렸던 그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1994년 티엠 네트워크 활동을 종료하고 유럽의 댄스음악을 수입하고 있던 에이벡스와 제휴해 소속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한 대표적인 스타가 바로 아무로 나미에와 글로브였다. 이를 시작으로 1999년까지 시노하라 료코, 히토미, H Jungle with t, 카하라 토모미까지 수많은 이들의 밀리언 셀러와 히트곡을 빚어냈다. 언론에서는 그를 중심으로 한 아티스트들을 '코무로 패밀리'라 지칭했으며, 그들과 함께 '코무로 붐'을 주도하며 일본 대중음악 신에 한 획을 그었다. 그야말로 '프로듀서의 이름으로 상품 가치가 생겨나는 광경'을 처음 대중들에게 선사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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