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s 클래식] 명지휘자, 명연주자, 명프로듀서

에디션m

[60s 클래식] 명지휘자, 명연주자, 명프로듀서

2024.08.01
Special

에디션m

'이런 노래를 뭐라고 하지?'
'이 노래는 어떻게 유행하게 됐을까?'


우린 종종 음악을 들으며 장르, 아티스트, 혹은 노래의 이면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궁금해하죠. 또는 최애곡과 비슷한 노래, 최애 밴드와 비슷한 가수에 목말라 하기도 하고요. 하나의 음악을 접하면 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게되는 독창적 탐구형 리스너를 위해, 멜론과 전문가가 힘을 모아 대중음악 지침서를 발행합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에디션m에서 즐겨보세요.

음악을 탐구하는 멜로너를 위한 대중음악 지침서, 에디션m

Story

아날로그 황금기의 시작

음악계를 급속도로 대체한 LP를 바탕으로 음반사는 이제 세계적인 유통망을 갖추고 전 세계에 음악을 공급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 유명 연주자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레코드를 점령한 오케스트라의 인기는 점차 높아졌고,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의 지위는 이제 넘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제 막 경제 발전의 걸음마를 뗀 한국도 정경화를 필두로 클래식 음악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념의 시대, 음악의 시대

1960년대는 사회적으로는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모든 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극한 갈등의 시대였지만,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더없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우리가 전설적인 명연주자로 손꼽는 수많은 연주자가 속속 음반을 내놓고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미국, 소련,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지구촌 전역에서 최고의 음악가들이 최고의 솜씨로 완성도 높은 음반들을 쏟아내며 이후 70년대까지 아날로그 클래식 음악의 황금기를 이어가던 시기였다.

음악을 담는 매체로는 LP가 점점 진화하여 최고의 음질을 보장해주었고, 녹음기술과 오디오 산업이 급속히 발달하며 콘서트홀에서 직접 듣는 듯한 사운드를 구현해냈으며,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음악을 녹음하는 음반사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서로 인수 합병을 거듭하며 덩치를 키워 나갔고, 이들이 최고의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최상의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경쟁하는 바람에 소비자들은 번거로운 공연장에 가서 음악을 듣는 대신 얼마든지 손쉽게 집에서 최고의 음질로 최고 연주자들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된 시대였다.

명 연주자들과 프로듀서의 시대

이런 면에서 볼 때, 당시 음반사에는 레코딩 엔지니어 못지않게 중요한 직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다. 어떤 연주자를 발굴해서 어떤 레파토리를 어떻게 녹음할 것인지를 총괄하는 이들의 역할은 각 음반사를 대표하는 개성이 되곤 했다. EMI의 '월터 레그'는 원래 런던의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에서 '토마스 비첨 경'의 조수로 일하다가,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의 눈에 들어 그의 후임이 된다. 그는 이후 EMI의 주력 아티스트들의 진용을 새롭게 짜게 되는데, '한스 호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 '디누 리파티',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마리아 칼라스' 등 숱한 스타 연주자들이 그에 의해 데뷔하거나 혹은 그와의 녹음작업으로 수많은 명반들을 녹음하게 된다. 특히 카라얀과 칼라스는 그의 혜안이 찾아낸 숨은 보석이었으며, 소프라노 슈바르츠코프는 후에 그의 부인이 된다.

한편 데카 레이블의 프로듀서 '존 컬쇼'는 1950년대 말부터 '한스 크나퍼츠부슈'의 바그너 연주에 경도되어, 그와 최초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곡을 녹음하고자 하는 엄청난 포부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의 꿈은 당시 레코딩에 비협조적이었던 크나퍼츠부슈 대신, 젊고 영민한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에 의해 1965년 드디어 완성된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바그너 반지 시리즈 전곡 스테레오 레코딩이었다.

라이벌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는 이 레코딩이 50장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 겸 악담을 했지만, 그의 예측을 뒤엎고 솔티의 레코딩은 아직까지 가장 많이 팔린 레코드 중 하나로 평가될 정도로 놀라운 반응을 불러왔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린의 왕으로 불리던 하이페츠는 50년대 이후 60년대에도 실내악 녹음을 병행하며 여전히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후에 나타난 불세출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레오니드 코간, 아르투르 그뤼미오, 지노 프란체스카티, 나단 밀스타인, 헨릭 쉐링, 요제프 수크, 크리스티안 페라스, 마이클 래빈, 아이작 스턴 같은 걸출한 연주자들이 명 바이올리니스트의 계보를 이어가게 된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이후 득세하는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대부로 떠오르는데, 1960년 뉴욕 필이 링컨센터로 본거지 옮기며 카네기홀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적극 철거에 반대하며 재단을 만들어 카네기홀을 보존케 한 일등 공신이 되기도 한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쇼팽의 재래'로 불리며 19세기에 태어나 거의 한 세기 동안 평생을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30년대에 최초로 쇼팽의 마주르카와 야상곡 전곡을 연주한 후, 스테레오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쇼팽의 야상곡과 마주르카 전곡을 녹음해 불멸의 연주를 남겨놓았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빌헬름 켐프'는 벌써 세 번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집을 완성했으며, '알프레드 브렌델', '클라우디오 아라우', '프리드리히 굴다', '빌헬름 박하우스', '다니엘 바렌보임' 등이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완성했다.

'미스터 베토벤'으로 불릴 정도로 최고의 베토벤 연주자로 유명했던 '에밀 길렐스'는 끝내 소나타 전집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피아노 협주곡 전집은 세 차례나 만들었다. '철의 장막'으로 불릴 정도로 비밀스러웠던 소련 당국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문화사절로 길렐스를 처음으로 서방에 내보이자, 너무도 놀란 기자들이 '당신 같은 피아니스트가 소련에 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길렐스는 '제 조국에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를 위해 박수를 아껴 두세요.'라고 했던 말은 두고 두고 회자되기도 했다. 그 리히터는 너무도 유명한 영원불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명녹음을 남겨놓았는데, 라흐마니노프의 또 다른 협주곡인 3번과 역시 너무도 유명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는 한 번도 녹음하지 않았다. 리히터는 그 이유를 너무도 간단하게 설명하곤 했는데, 그건 바로 길렐스가 이미 녹음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휘자의 시대

SP에 비해 음악의 녹음시간이 거의 10배 이상 길어져 한 면에 약 30분 가까이 재생이 가능해진 LP는 녹음의 레파토리 또한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 짧은 피아노곡이나 바이올린의 소품 혹은 가곡이나 아리아 한 곡을 겨우 수록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LP 한 면에 협주곡 전곡과 양면을 통해 교향곡 전 악장을 모두 녹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목받는 연주자들마저 바뀌게 만들었는데, 이전에 주로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 혹은 가수 같은 연주자들이 녹음의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관현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급속히 주역으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수장인 지휘자가 가장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야흐로 지휘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술한 대로 이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가장 먼저 이익을 본 것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나치당원 전력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없었던 그는, EMI와 함께 주요 레파토리들을 선점하며 일찍 레코딩의 위력을 실감했는데, 당시 앞으로 레코딩의 시대를 예견한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여러 악단에서 최고의 연주자들을 뽑아 조직한 녹음전문 관현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카라얀보다는 선배였지만 그를 질색하며 마치 라이벌처럼 대립했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당대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빈 필과 베를린 필을 호령하며 위세를 과시했지만, 결국 그가 타계한 후 베를린 필의 지휘봉은 카라얀에게 넘어가게 된다. 무려 종신지휘자로 취임한 카라얀은 1962년 두 번째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베를린 필과 녹음하게 된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두고 대립했던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오케스트라를 떠나, 무려 38년 동안이나 베를린 필에 돌아오지 않았고, 1960년대 카라얀의 독일계 라이벌이었던 '카를 뵘'은 베를린 필과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집을 남겼으며, 뉴욕 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최초로 '말러붐'을 일으키며 그의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

1967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곤욕을 치렀던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던 때였다.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이때 미국 뉴욕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당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콩쿨이었던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온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19살짜리 소녀 정경화가, 유대인의 대부 '아이작 스턴'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최고 대회에서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과 함께 공동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당시 문화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던 정부와 국민은 정경화의 우승소식에 환호했지만, 장하다는 칭찬 말고는 해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경화에 이어 그의 친언니인 정명화가 1971년 제네바 국제 콩쿨 첼로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그의 동생인 정명훈이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쿨 피아노 부문에서 입상하면서, 이른바 정트리오에서 비롯된 클래식 열풍은 서서히 한국에서도 싹을 틔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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