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과 신뢰를 담아, 트리포노프&바바얀의 [Rachmaninoff for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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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과 신뢰를 담아, 트리포노프&바바얀의 [Rachmaninoff for Two]

2024.04.02
Special

존경과 신뢰를 담아, 트리포노프&바바얀의 [Rachmaninoff for Two]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Daniil Trifonov). 그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입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1위, 쇼팽 콩쿠르 3위 등 세계 최고의 콩쿠르에서 연달아 입상하며 큰 화제를 모았던 것이 2010년 무렵이니 트리포노프가 본격적인 프로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네요. 사실, 콩쿠르에서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으며 출발하는 것일 뿐이지 콩쿠르 입상이 음악가로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콩쿠르 입상자가 자신을 향한 애호가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고유의 색을 음악에 덧입혀가는 과정은 매우 길고 고단합니다.

트리포노프는 콩쿠르 우승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는 음악성을 선보임과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음악에 부여하며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는 뛰어난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젊은 피아니스트를 넘어 거장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죠. 특히 조국인 러시아 음악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바로크 음악부터 미국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는 방대한 레퍼토리는 트리포노프만의 큰 강점입니다.

최근 트리포노프는 굴지의 클래식 레이블인 도이치그라모폰(DG)를 통해 [Rachmaninoff for Two]라는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사실 트리포노프는 이미 DG를 통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등 다양한 라흐마니노프 작품을 녹음하며 큰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전설적인 20세기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들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오늘날의 감성이 조화를 이룬 트리포노프만의 라흐마니노프를 선보였죠.

이번에 발매된 앨범은 [Rachmaninoff for Two]라는 제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독주 레퍼토리가 아닌 피아노 듀오로 기획되었습니다. 트리포노프의 파트너로 이름을 올린 세르게이 바바얀(Sergei Babayan)은 트리포노프의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 스승이자 평생의 멘토죠. 콩쿠르 우승 이후 국제적 유명세를 얻고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도 트리포노프는 틈만 나면 바바얀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바바얀은 트리포노프에가 깊은 신뢰와 존경을 보내는 인물이죠.

물론 바바얀이 뛰어난 교육자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앨범이 많지 않고 화려하게 드러나는 연주활동을 하지는 않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을 뿐, 젊은 시절 수많은 콩쿠르를 휩쓸며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수많은 연주를 선보였죠. 특히 지난 2018년에는 DG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와 듀오 앨범은 그의 첫번째 DG 앨범이자 '은둔 고수'의 건재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트리포노프는 이번 앨범에서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을 파트너로 만나 더욱 원숙한 연주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트리포노프가 직접 편곡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의 3악장으로 달콤하고 로맨틱하게 트랙을 시작하죠. 이후 차이콥스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을 거쳐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마지막 걸작 '교향적 무곡'으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오늘날 '교향적 무곡'은 관현악 버전으로 더 자주 연주되지만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편곡한 피아노 듀오 버전은 관현악 버전 못지않게 대담하며, 오히려 피아노만이 지닐 수 있는 표현의 자유와 템포의 대조가 훨씬 극대화되기도 합니다. 단지 두 대의 피아노만으로 라흐마니노프가 흡수하고 경험한 모든 음악적, 영적, 문화적, 철학적 정수들을 집대성한 결정체를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작품이죠.

라흐마니노프는 1942년에 호로비츠와 함께 이 곡을 초연한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80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24년, 러시아 출신의 트리포노프가 그의 스승이자 역시나 러시아의 피아니즘의 명맥을 지켜온 바바얀과 함께 이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분명 큰 의미가 있습니다.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거장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후배 음악가들의 깊은 존경인 것이죠.

곡리스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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