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듣다, 피아니스트 Fred Hersch의 [Silent, Listening]

장르 인사이드

침묵을 듣다, 피아니스트 Fred Hersch의 [Silent, Listening]

2024.04.23
Special

침묵을 듣다, 피아니스트 Fred Hersch의 [Silent, Listening]

ECM 레이블은 특별합니다. 가장 먼저 레이블의 정체성 측면이 그렇죠. 'ECM은 어떤 음악을 다루는 레이블이야?'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사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령, 흔히 DG라는 약칭으로 더 익숙한 도이치 그라모폰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다루는 레이블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죠. 반면 블루노트는 재즈 장르의 대표적인 레이블입니다. 하지만 ECM을 이처럼 장르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Keith Jarrett, Gidon Kremer, Charlie Haden, Arvo Pärt, Andras Schiff, Pat Metheny, 정명훈 등 ECM을 거쳐간 수많은 음악가들은 ECM의 설립자이자 대표 프로듀서인 Manfred Eicher와의 긴밀한 협력 아래 독특한 콘셉트와 사운드를 구축했습니다. 이른바 'ECM 사운드'라고도 불리는 ECM만의 색채가 뚜렷한 음악들이 바로 이러한 결과물이죠. ECM은 재즈나 클래식은 물론 아방가르드 뮤직, 민속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모두 아우르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해나갔습니다.

미국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Fred Hersch가 최근에 발매한 신보 [Silent, Listening]도 이러한 ECM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앨범입니다. Hersch는 지난 2022년 트럼펫 연주자 Enrico Rava와의 듀오 앨범 [The Song is You]를 통해 ECM 레이블로 첫 번째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이 녹음 작업에서 프로듀서 Manfred Eicher를 처음 만난 Hersch는 이내 Eicher의 작업물에 매료되었고, Eicher에게 솔로 앨범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을 건넸죠.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새 앨범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했고 이렇게 탄생한 앨범이 바로 [Silent, Listening]입니다.

[Silent, Listening]은 지금까지 ECM에서 발매된 전설적인 피아노 솔로 앨범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음악적 완성도와 독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음악의 순간적인 즉흥성이 뚜렷하게 강조된다는 점이죠. 물론 Hersch가 재즈 기반의 피아니스트인만큼 즉흥연주를 하는 것 자체는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 보여주는 Hersch의 즉흥성은 조금 다릅니다. 기본적인 패턴과 틀을 유지하며 그 위에서 즉흥연주를 펼치는 일반적인 재즈 즉흥연주와 달리 [Silent, Listening]은 정말로 예상할 수 없는 순간적인 변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재즈와는 또 다른 느낌이며, 20세기 포스트 모더니즘 음악과 21세기의 네오클래식 그 사이 어딘가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특히, 네 번째 트랙이자 앨범의 타이틀이기도 한 [Silent, Listening]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아티스트의 자유로운 창작과 연주 앞에서는 장르적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음악이 존재하지만 고독하고 적막함이 흐르는, 그야말로 '침묵을 듣는다'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독특한 청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곡이죠.

[Silent, Listening]의 대부분 트랙은 Hersch의 순수 창작곡이지만 수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이 그러하듯 유명 재즈 스탠더드를 활용한 트랙도 존재합니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Duke Ellington, Oscar Hammerstein II 등 전설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은 깊고 진지한 앨범의 중간에서 여유로운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점은 앨범의 기술적인 완성도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면 앨범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겁니다. 하지만 ECM 특유의 균형 잡힌 음향과 음질은 이번 앨범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하고 있죠. 이러한 양질의 사운드는 프로듀서를 맡은 Manfred Eicher의 오랜 관록과 ECM 레이블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장인정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뛰어난 음악가와 프로듀서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ECM 레이블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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