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의 시간, 사이먼 래틀(Simon Rattle)과 베를린 필하모닉

장르 인사이드

베를린에서의 시간, 사이먼 래틀(Simon Rattle)과 베를린 필하모닉

2024.05.16
Special

베를린에서의 시간, 사이먼 래틀(Simon Rattle)과 베를린 필하모닉

새로운 천년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던 지난 1999년 6월. 독일 베를린에서는 특별한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바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라 할 수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차기 상임지휘자 투표였죠. 단원들의 의견이 일치할 때까지 회의가 계속된다는 점에서 교황 선출 선거인 콘클라베에 비유되는 이 투표에서 선출된 음악가는 영국의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당시 40대 중반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에서 인상적인 음악을 선보였던 젊은 영국인 지휘자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당시 음악계는 대단히 술렁였습니다.

전임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과는 비할 데 없는 오라를 만들어냈고 그 뒤의 상임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와는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연주력을 갖춘 단체로 그 명성을 확고히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래틀 체제에서 보다 열린, 국제적인 이미지를 갖춘 조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갖춘 음악가들이 새로운 베를린 필 단원들이 되었으며, 집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인 디지털 콘서트홀의 도입 또한 사이먼 래틀의 주도하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21세기 들어 그 중요도가 감소했다고 평가받는 음반 작업에도 사이먼 래틀은 대단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장기로 삼아왔던 말러의 교향곡과,

주류 교향악과는 다른 스타일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과 여러 현대음악,

그리고 이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의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있던 베토벤, 브람스 같은 음악가들과,

래틀이 개인적으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하이든의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사이먼 래틀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분량과 질적인 측면 양쪽을 만족시키는 다양한 작업으로 세계의 청중을 만났습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지난 16년간. 오늘은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음반 중 특별하게 기억되는 앨범을 몇 장 골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화려한 대관식

말러의 '교향곡 5번'

지난 2002년 9월 7일은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새로운 상임지휘자로서 무대에 오른 날로 기록됩니다. 이날 연주회를 위해 래틀이 선택한 작품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일찍이 레너드 번스타인이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바 있지만 그 후로도 말러의 음악은 한동안 주류 음악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었는데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사이먼 래틀은 자국인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말러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말러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 바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해야 할까요? 말러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에너지와 래틀의 역동성. 궁합이 좋은 두 음악가의 만남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새로운 장을 이렇게 화려하게 열었습니다.

베를린 필의 연주로 듣는 스테디셀러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클래식 음악 단체 또한 수익을 발생시켜야 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간과합니다. 이는 정부의 지원이 상당한 베를린 필하모닉 또한 마찬가지이죠. 세계 최고라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단체 또한 언제 어디서나 청중을 끌어당길 수 있는 인기 작품을 자주 연주하곤 합니다.

곡리스트 18

그런 점에서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처럼 연주하기 좋은 작품은 또 없을 것입니다. '호두까기 인형'. 이보다 개성 있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캐릭터성이 확실한 작품인데요. 각 악기에 있어서 최고의 연주자들로 손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의 아기자기한 합주력을 경험할 수 있는, 음악 그 자체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곡입니다.

래틀이 만난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들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의 작업을 훑어 나가다 보면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라 장,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와 함께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앨범. 두 러시아 거장이 서늘한 감각으로 써낸 명작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선명하게 그려내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와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사라 장의 독주로 만날 수 있는 앨범입니다.

비록 베를린 필과의 협업은 아니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함께한 앨범도 놓치면 아쉽겠습니다. 베를린 필 차기 상임지휘자로 취임이 확정된 이후인 지난 2000년 12월 1일. 빈 무지크페어아인의 황금홀에서 빈 필하모닉과 함께한 연주회에서 정경화는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악단이자 브람스 연주에 있어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과 정경화의 만남,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습니다.

모든 영광의 순간을 한자리에서

'The Sound of Simon Rattle and the Berliner Philharmoniker'

곡리스트 26

위에 소개한 앨범들 이외에도 사이먼 래틀은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음악을 베를린 필과 함께 선보였습니다. 때문에 무엇을 들어야 할지, 그 선택이 쉽지 않기도 한데요. 조금 더 편하게 래틀의 활약상을 살펴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작년에 발매되었던 컴필레이션 앨범, [The Sound of Simon Rattle and the Berliner Philharmoniker]를 추천해 드립니다. 앞서 소개했던 말러의 '교향곡 5번'부터 구스타브 홀스트의 교향 모음곡인 '행성', 드뷔시와 라벨,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악곡.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본격 영화음악 작업으로 홍보가 되었던 영화 '향수'의 OST까지. 다채로운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아우르는 명인의 솜씨를 이 앨범은 한자리에서 경험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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