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열병, 그리고 나를 위로해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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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열병, 그리고 나를 위로해준 음악

2011.05.27

20대 중반이 됐다. 부모님인지, 교수님인지, 아님 너무 쉽게 철들어버린 학창시절 친구인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빨리 철들라' 재촉한다. 사실 누구도 소리 내어 재촉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곁에서 부추기기라도 하듯 조급해진다. 친구들은 하나 둘씩 사회로 떠나기 시작했고, 그사이 몇과는 연락마저 끊겼다. 방황이야 누구나 하는 것이겠지만, 다들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나 혼자만 긴 방황을 마치지 못한 것 같아 불안하다.

Life Is Strange

평생 순수예술을 할 줄 알았던 소녀 같은 친구는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 취업을 준비 중이다. 4년간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던 친구는 졸업 작품으로 멋들어진 서양화를 그려냈다.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친구는 승무원이 됐고, 최고 명문대에 진학한 고교시절 친구는 3년째 신림동에 있다. 그런가하면 일찍 사회에 뛰어든 어릴 적 친구는 남자친구와 결혼해 인생선배가 됐다. 같은 과 친구 한 명은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대학로 연극판에 뛰어들었고, 공대생이었던 지인은 졸업과 함께 전업 음악인이 됐다.
다들 성실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대견하고 훌륭해서 뭉클했다. 하지만 지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마음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야만 하는 내게, 그간의 예상과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친구들의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으므로.

New Moon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헌데 ‘진리’라 불리는 것들은 너무 많다. 혹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진리라 하고, 누군가는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라 한다. 안정적인 삶도, 치열한 삶도, 즐기는 삶도 모두 진리란다. 하지만 지금껏 겪어온 몇 번의 성취와 상실의 경험은 단 하나의 진리도 제공하지 못했다. 오래간 옳다고 믿어왔던 것은 한 번에 무너졌고, 단 한 번도 동하지 않았던 것에 완전히 매료되기도 했다. 예측불허의 경험들을 통해 모든 건 불확실하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게 됐고, 청춘의 지배적 정서는 곧 불안이 됐다. 어디 하나 확신으로 붙들어 맬 곳 있단 말인가, 하며, 벌벌 떨면서.
그렇다고 불안의 해소를 위해 쉽게 단정 짓거나 결정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쉼 없이 묻게 될 터. 하지만 이 끔찍한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불확실한 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택해야만 한다. 생존의 문제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불확실한 표류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나마 덜 미심쩍은 것을 진리로 삼고 붙드는 것.

Hatful of Hollow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는 젊은이에게 드물게 풍족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이다. 그 덕에 쓸데없는 걱정이나 몽상을 위해 기꺼이 많은 시간을 했다. 새벽이 익숙해지는 불면의 밤은 계속됐지만, 길고긴 걱정과 몽상의 끝은 보통 절망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데서 오는 막막함. 그렇게나 고민해놓고도 무얼 하고픈지 여전히 모를 때, 무얼 원하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때 찾아오는 절망감은 최악의 것으로, 무기력증을 동반했다. 당장 무언가를 위해 노력한다 해도 올바른 선택인지 알 수 없는데다, 기껏해야 부수적인 노력이나 가능하다는 허탈감에 휩싸인 탓이었다.
산뜻한 멜로디에 치기어린 반항심과 비참한 정서를 노래했던 스미스, 이유 없는 하강욕구와 공황상태를 담은 'Where is my mind'의 픽시스. 청춘의 알 수 없는 절망감은 많은 젊음을 창백한 얼굴로 노래하게 했고 또래의 비슷한 정서를 공유케 했지만, 때로 매우 위험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10년 전, 엘리엇 스미스는 키친나이프로 자신의 가슴을 수차례 찔렀다. 그의 음악에 열광하던 우울한 청춘들은 갑작스런 소식에 가슴을 쳤다. 특유의 우울함 때문에 혹자는 치명적이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위태로운 목소리. 한 젊은이의 청춘을 지배했던 알 수 없는 절망감은 어쩌면 이른 죽음을 택하게 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를 일이다.

Stone Roses

스무 살 때 만났던 남자친구는 좋은 아이였다. 받아본 적 없는 무조건적 호의와 감정을 매일 선물해줬다. 처음 느끼는 강렬한 감정에 그 아이와 난 경도되어 있었고, 만나는 내내 서로에게 전념했다. 하지만 행복해야할 관계 속에서 늘 목이 말랐다. 둘의 감정이나 그 아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며,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가 내어준 진심에 죄책감마저 느낄 즈음, 나를 사로잡았던 건 그 아이가 아닌 사랑과 관계 자체에 대한 갈증과 열망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무언가에 대한 갈증은 비단 연애감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고, 뭔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샘솟았다. 모든 것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고, 겪고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그리도 열망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구체적인 목적과 대상이 있는 욕구가 아닌 순수한 욕망 그 자체로서 작용했고, 사실 그래서 더 간절했다.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갈증이나 평생 추구할 가치에 대한 열망,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염원과 같이.
이 갈증과 열망은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고, 그 덕에 방황하던 어떤 청년들은 무언가를 위해 움직였다. 고통스런 병증은 놀랍게도, 성취나 창작의 욕구으로 발전했다. 원하는 것을 단 한번만 갖게 가질 수 있게 해주시라 기도하는 스미스나, 동경 받고픈 순수한 열망을 노래한 스톤 로지스의 사라지지 않는 음악들처럼.

Permanent: Joy Division 1995

경험의 밑천은 한정되어 있었다. 아직 젊기에, 많은 것을 겪지 못한 탓이었다. 때문에 드물게 겪었던 상실의 경험은 엄청난 좌절감과 슬픔을 안겨줬다. 목표의 상실이나, 의욕의 상실, 유명을 달리한 지인과의 이별. 그 중 실연은 가장 강렬한 상실의 경험이다.
꼬박 1년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근 한 달간 근신하며 식음을 전폐했던 적이 있었다. 뭔가 크게 잃어본 경험 없이 쉽게 살아온 터라 타격이 컸다. 간신히 몸과 맘을 추스르니 거의 넉 달이 지나있었지만, 여전히 종종 슬펐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놀랍게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녀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냉정하게 전화를 끊고 기분이 묘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바라던 한마디였거늘, 지나고 나니 옛남친의 찌질한 미련으로 느껴질 뿐이라니.
그렇게 모든 것은 한 번 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아무리 소중했던 것들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거나 빛이 바래고 만다는 속상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거다. 그 좋았던 것들이 결코 머물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부쩍 겁이 났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곧 사라져버릴 것들을 어찌 그냥 보낼 수가 있을까! 대상의 상실을 겪은 감정과 에너지는 알맞게 전환되어 다른 사랑의 대상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새로운 사람일수도, 보다 멋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일수도, 미래를 위한 투자 혹은 목표를 위한 노력일수도 있다. 상실의 경험은 깊은 절망과 좌절을 주곤 하지만, 강력한 동력이 되는 의외의 에너지를 남긴다.

이장혁 Vol.2

친구들에게 종종 묻곤 했다.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이는 너도 나처럼 이렇게 힘드니, 하고. 이야길 들어보면 사실 다들 힘들어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사는 또래인지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듯 했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공부가 힘들어, 연애가 안 풀리네, 나라는 인간이 너무 한심해, 꿈이 뭔지 아직도 모르네 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는거다. 조언이나 위로를 받기 위해 이야길 나눠보지만 허전하기 그지없다. 그 심정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아도 마음 깊은 곳까지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가 건네는 ‘넌 잘 할거야’ 라던가 ‘힘내’ 같은 한마디는 결코 힘이 되지 못했다. 타인과 나눌 수 없는 고민과 슬픔들이 있다니. 그렇게 온전한 공감이란 없음을 깨닫는 순간, 결국 내 안의 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만다. 슬프게도, 인생은 독고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참하진 않았다. ‘혼자서도 잘 고민하고 잘 짊어지는 법’을 익히는 것은 모든 청춘에게 주어진 몫임을 알기에.

In Exchange

하지만 모든 것이 혼자의 몫은 아니고, 나눌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 많은 것을 홀로 감당하다 보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필요이상으로 고독해지기 십상이다.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민과 감정들이 무겁게 느껴질 땐, 짐을 좀 덜 필요가 있다. 실질적 도움이나 조언이 아니어도, 고민을 털어놓는 행동이나 따뜻한 손을 잡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하다. 상투적인 위로의 말보다, 누군가의 경청이나 따뜻한 토닥임이 큰 힘이 될 때가 있는 것처럼, 노골적인 위로의 말 없이도 친구와 자신을 다독이는 힘을 가진 이승열씨의 음악처럼.
고민을 공유하고 나누는 법을 익히는 건 홀로 감당하는 법을 익히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서로를 뼛속깊이 공감할 순 없어도 누군가는 나의 위로가,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단 사실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My Generation (Shel Talmy - Stereo Ver.)

사소한 고민도, 중대한 선택을 위한 고민도 결국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온다. 편리하거나 혹은 심원하거나, 적용과 해석에 따라 알다가도 모를 것이 되는 근본적인 고민들.


쓸데없어 보이나 가장 근본적인 이 고민들은 일반적인 사춘기 시절부터 충분한 숙고의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대부분은 줄 세우기와 같은 숫자놀음 속에 파묻혀 어정쩡하게 지나갔다. 책이 아닌 교과서속에 담긴 도덕과 윤리, 인생을 위한 가치판단을 시험을 위해 ‘공부’했으니. 그렇게 제 때 앓지 않고 유보된 사춘기는 20대에 비로소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진짜 사춘기처럼 근본적인 고민을 하기에 20대 중반에겐 짊어진 짐이 많다. 배움이 아닌 문제를 푸는 기술을 익히고, 등록금 혹은 독립을 위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점수를 위한 공부를 하거나 취업을 위한 자격증을 따는 등의 중요하게 보이는 일들이 산적해있기 때문이다. 꿈과 이상을 ‘취업’이라 부르며 남들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들을 자의 반 타의 반 우적우적 해나갈 수밖에 없지만, 진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단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 열병 같은 시절은 소중하다. 이 시기에 제대로 앓지 않으면 청춘의 열병은 만성이 된다. 앓을 때 제대로 앓아내야 뒤탈이 없는 홍역이나 수두처럼,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야만 한다.
절망과 갈증과 열망과 상실의 시간동안, 꽤나 많이 앓았다. 자책과 합리화를 통해 상처받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시야는 넓어졌고 조금은 자랐다. 이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엄청나게 절망적인 동시에 엄청나게 희망적이다. 강력한 하강욕구와 상승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언제나 원점에 서있는 느낌이다. 나쁘게 말하면 언제나 제자리인 것 같은, 좋게 말하면 언제나 시작점에 서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래서 다행이다. 청춘은 불안, 갈증과 열망, 상실로 인한 결핍이라는 엄청난 동력을 가졌다. 결정된 것이 없기에 가능성이 있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나가는 매력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린 종종 표류는 할지언정, 죽은 듯한 정지 상태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유기체에게 움직임 없음은 곧 죽음이라고.

The Essential Bob Dylan 3.0

"미완성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 아티스트 콜리어 쇼어의 말이다. 고작해야 이십여년 살아온 미완성의 젊음에게 모든 것은 생경하다. 그래서 많은 것이 불확실해 보이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때론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 아닌가. 온통 새로운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설렘, 풍요로운 감정들. 게다가 지나가버리면 이내 사라져버릴 청춘이라니! 다신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틋함은 좌절감을 비롯한 열병의 고통을 감내하게 한다.
미화시키거나 날 것인 채로 남겨두거나, 시들게 두거나 물을 주거나. 모든 것은 젊음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 개인의 몫인 듯하다. 현재를 수없이 정의하고, 다시 무너뜨리고, 찢어버리고 다시 써내려가면서 순간순간 존재함을 느낀다면 좀 아파도 뭐 어떤가.

마지막으로 내게는 치유의 음악과 같았던 몇 곡을 골라보았다. 수많은 불면의 밤을 뒤척이던 동안, 울고 웃으며 새벽길을 쏘다니던 동안 이 음악들은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 머잖아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의 노랫말들. 이 음악들이 나 아닌 누군가에게도 위로 혹은 치유제로 작용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