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2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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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2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OST'

2012.05.03

먼 옛날, 고대 그리스 시대쯤에 사랑은 ‘병’으로 치부됐다. 칸트는 사랑의 비이성적 속성을 두고 ‘영혼의 병’이라 칭하기도 했단다. 사랑에 대한 비관적 정의가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사랑은 종종 이성 잃은 폭력이 된다. 상대를 소유하기 위해, 사랑 받기 위해, 혹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인데 폭력이라고? 충분히 폭력적일 수 있다.
자신의 판타지 충족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위해 다른 사랑을 왜곡시킨 여자. 자신도 모르는 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어쩔 수 없었다는 고백은 어쩐지 힘이 없다.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측은하다. 스톡홀롬 신드롬인가, 악역이 측은하다니.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벌어진 이 이야기는 시카고의 한 공원, 위커파크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를 경계 없이 오가며 진행된다, 끊임없이 곱씹는 지난 사랑이 그러하듯. 뉴욕으로 건너가 성공한 광고인이 된 매튜(조쉬 하트넷)가 시카고로 돌아온다. 약혼자와 함께 돌아온 시카고,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과거의 사랑이 여전히 눈에 밟힌다. 2년 전,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매튜와 리사(다이앤 크루거). 뉴욕으로 함께 가자는 매튜의 제의에 주저없이 응한 리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시카고에서 주위를 맴도는 그녀의 흔적 발견하고, 다시 찾기 위해 시간과 자취를 더듬어간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랑의 주변부엔, 중심이 되고자 하는 알렉스(로즈 번)가 있다.
로맨스를 다루면서 스릴러적 방식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욕심(?). 빠른 호흡의 전개와 감각적이고자(?) 하는 편집.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흥행엔 참패했다. 하지만 이입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와 감정선의 매력 때문에 마니아 층도 꽤 두텁다.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지만, 두 영화는 각기 다른 결말로 간다.
흥행에는 참패했어도 ‘라빠르망’보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는 모두가 바라는 ‘행복한 결말’보다 멋진 음악으로 무장한 OST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순전히 Coldplay의 The Scientist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트레일러 때문이다. 물론, 영화 내내 상념에 젖어 슬픈 남자 매력을 폭발시킨 조쉬 하트넷의 공도 크다.

매튜(조쉬 하트넷)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공간적 배경, 시카고. 영화는 차들과 인파가 오가는 시카고의 거리를 비추며 시작된다. 화면전개의 빠른 호흡이 도시의 속도감과 만나 매력적인 긴장감을 남긴다. 영화 전체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오프닝 내내 흐르는 음악은 Stereophonics의 Maybe tomorrow. 건조한 목소리에 서정적인 멜로디, 드라마틱한 전개가 돋보이는 이 곡은 겨울의 시카고와 위커파크의 전경과도 잘 어울린다.
영국 웨일즈 출신 밴드 Stereophonics는 상당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이들은 92년 결성 이래 발표한 7개의 앨범 중 1집부터 5집까지의 5개 앨범이 UK차트 1위에 오른 저력의 밴드다. 종종 라디오에서 플레이되는 과거 광고 삽입곡 ‘Have a nice day'가 바로 이들의 노래. 지난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며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는데, 음반 못지않은 훌륭한 라이브 덕에 수많은 팬들이 감동의 눈물을 삼켰다는 후문이다.

사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엔 조쉬 하트넷 못지않은 주연이 한 명 더 있다. 사랑의 주인공도 아니고, 당사자도 아니다. 사실 악역에 더 가깝다. 모든 아름다운 사랑에 존재하는 훼방꾼 같은 인물. 하지만 가장 측은하다. 나쁜 수로 얻어낸 사랑에서도 끝까지 주연이 되지 못하고 훼방꾼에 그친다. 매튜를 짝사랑하는 인물이자, 리사의 친구인 알렉스다.
‘Wicker park’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라는, 보다 흥미로운 제목으로 번역된 것이 반갑다. 문제적 인물이자 정서적, 물리적 동선이 큰 인물인 알렉스의 비중이 반영돼 한결 자연스럽다. 원제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사랑 주변부의 슬픔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리사보다 훨씬 이전부터 매튜를 사랑해왔다. 짝사랑이었다. 갈망하던 대상이 다른 이와 사랑하는 동안에, 그녀는 창문 밖 그를 훔쳐보며 홀로 사랑을 키웠다. 의외로 달콤한 멜로디가 슬픈 염탐의 장면을 장식했는데, 나른한 하모니카 전주가 아름다운 Mazzy star의 Flowers in December가 그것이다.
알렉스의 사랑은 Mazzy star의 노래 제목처럼 ‘12월에 피는 꽃’과 같다. 스토커 못지않은 집착일지라도, 본인에겐 안타까움에 더 아름다워지는 사랑 아니겠나. 이런 점이 바로 알렉스를 미워하지 못하게 하는 지점일거다.

매튜와 리사는 첫눈에 반했다. 서로에게 급속도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영화에 묘사돼 있지만, 그들이 얼마간 만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뭐, 기간이 그리 중요치는 않다만, 대충 짐작하기로는 짧고 강렬한 만남이었으리라. 그러니까 2년이나 잊지 못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판타지조차 깨지 않고 간직할 만큼이라면, 분명 길지는 않았을테다.
매튜는 끊임없이 리사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판타지를 회상한다. 처음 그녀를 뒤쫓던 날, 그녀의 춤, 카페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 작별의 키스. 환영처럼 이어지는 기억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매튜의 모습을 그리는데 영화 대부분이 사용된다.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를 생각하는 일 뿐이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그녀에 대한 회상과 판타지, 마치 리사의 테마처럼 흐르는 곡은 Plus/Minus의 ‘All I DO'. 잔영 혹은 속삭임 같은 이들의 노래는 그야말로 매튜의 반영이다. 심지어 가사도 이 것 뿐이다.

“All I do, is just think about you."

문득, 매튜의 사랑이 알렉스의 사랑과 다를 것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를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라면 이 영화의 테마처럼 사용된 이 음악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밴드 Coldplay의 Scientist.
2년의 간극을 뛰어넘는 재회 씬이자 엔딩씬을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음악만으로 끌고 간다. 조쉬 하트넷과 다이앤 크루거의 애절한 연기 덕일 수도 있겠지만, Coldplay 음악 특유의 중력 덕이 아닌가 싶다. 아름다운 재회도 인상 깊지만, 이 영화의 엔딩을 생각하자면 Scientist의 전주나 크리스 마틴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덤덤하게 사랑의 처음과 끝을 돌아보는 홀로 남은 이의 다짐 같은 노랫말이, 크리스 마틴의 거칠지만 유약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파고드는 것이 가슴 먹먹하게 뻐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