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1 'Lost in 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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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1 'Lost in translation'

2012.05.02

그런 날이 있다. 아침시간 무심결에 흘려들었던 음악이 종일 흥얼거려지는, 그래서 그 날의 일과와 관계없이 하루가 하나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날. 영화도 마찬가지다. 우연한 장면에서 맞닥뜨린 음악은 때로 영화보다 짙게 남는다. 세세한 스토리나 대사는 가물가물한데, 장면 너머로 흐르던 음악만은 유독 생생하게 기억나던 경험이 있지 않던가.
마음을 울리는 대사도 좋다. 의미심장한 쇼트도 좋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대사나 쇼트를 넘어 영화에 대한 인상 그 자체가 된다. 매력적인 음악 덕분에 페이버릿 리스트에 오른 영화가 꽤 되는 걸 보면, 영화음악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 살아남기도 하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몇 편을 골랐고, 몇 곡을 꼽았다.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을 땐 이 음악 듣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 음악을 듣고 싶을 땐 이 영화 보는 것으로 충분한, 같은 영혼의 영화와 음악들.

Lost in translation의 주연은 관록의 배우 빌머레이와 다재다능한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
여주인공 샬롯은 포토그래퍼인 남편을 따라 도쿄의 호텔에 머무는 중, 남주인공 밥은 한물 간 영화배우로 일본의 산토리 위스키 광고를 찍기 위해 도쿄로 왔다. 여자는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포토그래퍼 남편 때문에 홀로 호텔에 남겨지거나 도시를 헤매고, 남자는 일하는 내내 통하지 않는 일본어와 부딪힌다. 두 사람 모두 외딴 곳에서 외딴 생활 중이다. 누군가와의 대화 -형식적이거나 텅 빈 대화 말고 진짜 대화-가 절실하고, 이 고립감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다는, 대충 그런 내용이다.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로맨스물이니 비포 선라이즈와 얼개가 비슷하겠군, 싶지만 그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로맨스가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닌 탓이다.

첫째, 명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감각적인 영화입니다.
둘째,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인데 어떤 감각 없는 사람이 이 멋진 제목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고 엉망으로 번역했습니다.

셋째, 이 영화 음악이 아주 끝내줍니다. 영화의 일부, 그 이상이에요.

그 장면 : #가라오케1, 노래하는 빌 머레이
이 음악 : More than this - Roxy music

“신사숙녀 여러분, 배우 밥 해리스 씨를 소개합니다.”
핑크색 가발을 쓴 스칼렛 요한슨이 빌머레이를 호명하며 다음 노래를 위해 마이크를 넘긴다. 선곡된 음악의 전주가 흐르자 “이 노래 어려운데!” 한숨 쉬는 그, 하지만 곧 마다않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청량한 멜로디의 도입부가 인상 깊은, 부르기 어렵다는 그 노래는 70-8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밴드 Roxy music의 'More than this'.

빌 머레이의 목소리는 느끼함이 살아있는 미끈한 보컬의 브라이언 페리와 사뭇 다르다. 사실 얼핏 들어도 훌륭한 노래실력은 못된다. 회식자리서 분위기잡고 댄스곡마저 무게 있게 소화하는 부장님 풍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읊조리듯 노랫말을 외는 빌머레이의 중후한 목소리는 의외로 이 노래와 잘 어울린다. 생기 없다 못해 체념적이기까지 한 표정까지도.

고독한 정서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서일까, “More than this”의 노랫말은 노래만 들었을 적보다 몇 갑절 쓸쓸하게 들린다. 빌머레이를 바라보던 스칼렛 요한슨의 공허한 시선에도, 청량하고 아름다운 멜로디 위에 얹힌 노랫말에도 켜켜이 쌓여있는 근원적 외로움이 꽤나 오래도록 남는다.

가장 좋아하는 헐리우드 여배우를 묻는 질문에 늘 스칼렛 요한슨을 꼽는다. 아름다운 외모, 출중한 연기력, 압도적 관능미. 이 여배우를 완성하는 수많은 매력 중 최고는 단연 허스키한 목소리다. 은근한 목소리로 외는 대사는 같은 여자가 들어도 대단히 매력적이니까. 존재감 확실한 목소리가 범상치 않구나 싶었는데 사실 이 언니, 정규 앨범을 낸 가수 되시겠다.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이 십분 발휘된 Lost in translation의 한 장면, 도발적인 가사의 이 노래 덕에 숨겨뒀던 그녀의 노래실력을 발견한 팬이 상당할 터. 그러한 연유로, 80년대 영국밴드 The Pretenders의 'Brass In Pocket'을 농염하게 부르던 영화 속 장면을 우선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칼렛 요한슨은 연기활동만큼 꾸준한 음악활동을 해왔다. 몇몇 영화에서 멋진 노래실력을 뽐내는가 싶더니, 영화음악 컴필레이션 참여로도 성에 안찼던 모양이다. 2008년 발매한 솔로 데뷔 앨범은 대중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탐웨이츠, 데이빗 보위와 같은 걸출한 뮤지션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로 개성 있는 앨범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싱어송 라이터 Pete yorn과 함께한 듀엣앨범은 “Relator"등의 넘버가 히트하면서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 궁금하신 분 있으실까봐 덧붙이자면, 스칼렛 요한슨 매력의 원천, 허스키 보이스 유지비결은 매일 한 갑씩 피우는 담배에 있다고 한다. 허스키 보이스의 유지에는 알고보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 우연히 거리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뒷모습을 발견한 빌 머레이가 차를 멈추고 그녀를 향해 간다. 뜨겁고 격정적인 키스나 열렬한 애정의 확인 같은 건 없다. 뜨거움을 대신한 건 뜻모를 속삭임과 포옹.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한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결혼을... 애를...’ 이런 식의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두 사람은 따뜻한 포옹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간다. 다소 쓸쓸한 엔딩이지만, 함께 흐르는 멜로디는 의외로 밝다. The Jesus & mary chain의 'Just like honey'.

80년대 노이즈음악과 슈게이징을 이끌던 탕아들, Jesus & mary chain. 그들의 수작앨범 Psycho Candy에 실린 'Just like honey'는 과한 리버브와 짙은 노이즈로 가득하다. 하지만 날카롭지 않고 외려 따뜻하다. ”너를 듣고, 이해하고, 다시 네게로 돌아가는 일은 내게 가장 힘든 일이지만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며 황홀할만큼 달콤해한다. 어찌 보면 씁쓸한 엔딩에, 이들이 노래하는 달콤함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람은 넘치지만 모두가 외로운 도시, 대화는 넘치지만 소통은 없는 관계. 사람들은 쓸쓸하다. 인파는 외롭고, 도시는 황량하다. 그래서 달콤해야 할 것은 위로다. 그 위로는 다른 게 아니다. 촉촉한 한 마디, 따뜻한 포옹 같은 것일 게다. 아마 극중 두 사람은 각자 외로움을 어렴풋이 헤아렸던 모양이다. 확실히도 아니고 그저 ‘짐작’하는 정도로만. 하지만 사실 그게 전부다. 누군가와의 ‘소통 가능성’을 확인한다는 것, 그게 전부다. 그 가능성 때문에 우린 겨우 마음을 열고, 교감하고, 사랑한다.

그게 Lost in translation이 해피엔딩인 이유다. 교감과 소통의 경험은 통역 불가한 모든 관계 속에서 살아갈 달콤한 희망이기 때문에. 그래서 영화 속 두 사람, 다시 외로운 사람들 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거다. 또 외로워질 것을 알면서, 약간은 두려워하면서, 하지만 희망적으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OST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Lost in translation". 사실 그녀는 영화 뿐 아니라 영화에 딱 맞는 감각적인 곡 선택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Lost in translation“ OST도 마찬가지다.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건조한 정서와 어울리는 몽환적인 슈게이징, 노이즈, 엠비언트 계열의 음악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 특히 My bloody valentine의 프런트맨 Kevin shields가 많은 곡을 담당한 이 OST는 대중적이진 않지만, 영화에 매력을 더하는 탁월한 선곡으로 가득하다. 추천넘버는 Kevin Shields표 묵직한 기타 노이즈에 쓸쓸한 도시의 정서가 느껴지는 ‘City girl’. 가사 없이 지루한 멜로디와 시끄러운 노이즈가 반복되는 곡들엔 영 흥미가 없다, 싶은 이들에겐 Phoenix의 ‘Too young'과 Happy end의 ’Kaze wo Atsumete'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