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7 'Wall-E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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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7 'Wall-E OST'

2012.05.03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의 이야기는 이미 많이 다뤄졌다. 책은 하물며 영화에서는 특히 더 자주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로봇을 스스로 개발하지만, 그 기술이 인간능력을 추월하는 것은 두려워한다. 수많은 공상과학영화들이 바로 그 지점을 지적해왔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기술이 우리 스스로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영화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대신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 인간 본연의 잠재력과 능력은 점차 무시되고, 도태의 문턱에 이른다. 이렇게 말하면 참 재미없는 공상과학 스토리 같지만, 영화 Wall-E는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등장하는 로봇은 지능이 좀 떨어지는 아날로그적 청소기계. 생긴 건 되게 무식하게 생겼는데, 알고 보면 대단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순정파 로봇이다. 이름은 Wall-E.

2008년 픽사가 내놓은 애니메이션 Wall-E. 무식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쌍한 얼굴의 청소로봇의 SF+로맨스+어드벤쳐+휴먼드라마쯤 되겠다. 뻔하다면 뻔할 ‘버려진 지구’ 스토리를 꽤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풀어내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로 지구가 뒤덮이고, 처리능력을 넘어선 쓰레기 때문에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이 됐다. 그래서 인간들은 우주선을 타고 수 세기 동안 우주를 유영하며 종족을 영위한다. 여기까지는 흔하디 흔한 SF물의 공통분모 되겠다. 재미있는 상상력은 여기부터다. 버려진 지구엔 청소로봇들만 남겨진다. 오로지 청소를 위해, 청소만을 생각하는, 청소 밖에 할 줄 모르는 로봇 ‘Wall-E(월이)’들은 수세기 동안 청소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고장이 나거나 태양광 충전을 제 때 하지 못해 수명을 다하고, 단 하나의 월이 만이 남아 지구를 청소한다. 홀로 지구에 남은 로봇은 인간들의 흔적을 치우며 인간의 모습을 닮아간다.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을 꿈꾸며. 그런 월이 앞에 인간 우주선에서 보낸 탐사로봇 이바가 나타나고, 애틋하기 짝이 없는(?) 로맨스가 시작된다.

이 황당무계한 스토리에 설득력을 더한 것은 영화의 OST다. 유명 영화음악가 토마스 뉴먼이 담당한 이 OST는 명확한 대사 한마디 등장하지 않는 러닝타임의 지루함을 음악으로 대신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돋보이는 필름 스코어도 매력적이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우주적 음악을 일부 활용하는 재치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빛나는 음악들은 섬세하게 선곡된 몇몇 트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봇 월이가 끊임없이 동경하는 음악들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곡들이다. 흔히 들어왔던 ‘La vie En Rose’부터, 배우이자 가수인 마이클 크로포드의 목소리까지. 인간성을 그리워하는 로봇의 인간적인 면모를 대변하는 선곡이 탁월하다. 그 덕에 Wall-E의 OST는 아카데미 시상식 OST부문과 최고의 트랙 부문 후보로도 올랐다.

지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간들은 자취를 감췄고, 빌딩 숲은 쓰레기와 먼지로 뒤덮였다. 생명체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지구엔 더는 희망이라곤 없어 보였다. 하지만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경쾌한 뮤지컬 넘버가 텅 빈 도시를 메운다. 다행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인간들이 있구나, 안심했는데 이게 왠걸. 왠 투박한 로봇 하나가 음악을 따라 부르며 쪼르르 폐허 속을 달린다. “간지나는 나들이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노래 부르면서 일하니 흥겹기라도 한가? 아니, 무슨 로봇이 이러냐. 깡통처럼 생긴 게.

동화적이고 만화적인 매력이 넘치는 이 곡은 사실 뮤지컬 넘버다. 토니상을 수상하며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60년대 뮤지컬 “Hello, dolly!(헬로 돌리!)의 명곡. 이 뮤지컬은 1969년 영화화됐다.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오페라의 유령’ 1대 팬텀으로 유명한 마이클 크로포드가 주연으로 분한 동명의 영화다. 월이는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을 끊임없이 돌려보며 인간들의 감정을 동경한다. 나들이 옷을 입고 설레는 표정으로 춤추는 마이클 크로포드를 보며 춤을 따라 하기도 하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인간성에 대한 동경을 그릴 때마다 영화는 이 곡을 활용한다. 심지어 오랜 우주선 생활로 퇴화된 신체와 감성의 인간들에게도 작용한다. 인간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영화의 테마와도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살아있는 넘버다.

우리의 로봇 월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영화 ‘헬로, 돌리!’의 마니아다. 매일 헬로 돌리의 음악을 들으며 영상을 반복해 보는 것이 취미. 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것은 로맨틱한 애정씬이다.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고 첫눈에 반했노라 고백하는 장면. 마이클 크로포드와 매리앤 맥앤드류가 낭만적으로 부르는 “It only takes a moment”. 월이는 두 남녀가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넋을 놓는다. 자신의 납작한 손가락을 꼭 움켜쥐며, 마치, 언젠가는 자신도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길 희망이라도 하듯.

로맨스를 꿈꾸는 로봇 월이에게 ‘It only takes a moment’를 부르는 영화 속 영화의 한 장면은 사랑의 감정을 동경하게 했다. 비록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지구지만, 월이는 꿈꾼다, 언젠가 사랑이 찾아오기만을. 인간들은 지구를 쉽게 포기했지만, 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주선 안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들과는 달리, 월이에게는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끊임없이 꾸는 꿈과 변함없는 희망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꿈꾸던 로맨티스트 월이에게 사랑이 왔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천사…는 아니고, 지구탐사 로봇이다. 아, 물론 정말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긴 했다. 이름하야 ‘이바’. 매끈하고 부드러운 몸매(?), 웃을 때 생기는 반달모양 눈(??), 위협이 되는 것이라면 다 폭파시켜 버리는 화끈함(???)까지. 월이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늘 첫눈에 반한 사랑을 꿈꾸더니, 진짜 이루게 생겼다. 이바는 지구에 남은 생명체의 자취를 찾고자 인간들의 우주선으로부터 급파된 탐사로봇. 그런 이바에게 관심사란 오직 생명체 뿐이다. 로봇 월이는 그저 외면당한다. 하지만 우리의 월이, 포기할 남자가 아니다. 월이는 계속 그녀 뒤를 쫓아다닌다. 스토킹 수준이다. 하지만 월이에겐 낭만적인 추격쯤 된다. 그녀만 보면 너무 떨려서 자꾸 실수한다. 고층 빌딩에서 추락하고(!), 폭발하고(!!), 감전되기도(!!!). 뭔가 엉뚱하고 귀여운 월이의 스토킹 장면에서 흐르는 곡은 ‘La vie En Rose’. LP판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아날로그감성의 트럼펫 연주가 잔잔하게 월이의 추격씬을 관조한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넘치는 듯한 루이 암스트롱의 보컬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바에 대한 월이의 사랑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우주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명의 자취를 품고 우주선으로 돌아간 이바를 따라 인간들의 우주선에 탑승한 월이. 퇴화된 몸의 인간들은 기계의 힘을 빌어 살고 있다. 투박하게 생긴, 이상하고 불쌍한 표정의 로봇과 만난 인간들은 뭔가 다른 감정을 느낀다. 화상대화나 기계가 다 해주는 일상 속 잊고 지낸 인간적인, 인간다운 삶에 대한 향수. 때마침 발견된 생명의 자취, 새싹을 통해 인간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갈 때가 됐음을 알았다. 제 발로 바닥을 딛고 섰던 적이 없었던 인간들은,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일굴 욕망을 인지했다.

다시 지구로 돌아온 인간들은 새로운 문명을 시작한다.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들이 중심에 선 진짜 문명. 영화의 엔딩은 이 문명을 기록한 벽화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 벽화 속엔 월이와 이바가 메시아인양 등장하고, 그들을 지구로 이끈 새싹은 문명의 상징이 된다. 이 장면에서 관록의 뮤지션 피터 가브리엘의 ‘Down to earth’가 흐른다. 아카데미 시상식 영화음악부문 후보에 올랐던 멋진 넘버다.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 청소로봇의 SF+로맨스+어드벤쳐+휴먼드라마의 엔딩에 한 몸같이 들어맞는다. 다시 지상에 발을 디딘 인간들에게 싹트는 희망, 그 원초적 에너지를 뭉클하게 전달하는 피터 가브리엘의 허스키한 목소리.

곡리스트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