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5 'Juno (주노)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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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5 'Juno (주노) OST'

2012.05.03

주노. 60-70년대 락음악과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는 평범한(?) 열여섯 소녀. 우리말로는 입에 익는 이름이지만, 영미권에선 흔치 않은 이름이다. 이름의 기원은 저기멀리 신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노의 아버지는 한 때 그리스 로마신화에 탐닉했다. 그 영향으로 딸에게 '주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노는 제우스의 유일한 부인인 헤라의 다른 이름. “주노는 아름답고 사악하지만 강하죠. 다이애나 로스(미국의 전설적 여가수)처럼.” 주노는 자기 이름의 어원과 스스로에 대해 설명한다. 당돌하고 쿨한 이 소녀. 영화 ‘주노’는 제목 그대로 주노의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릴만한 시...십대임신 이야기.

영화 제목이 ‘주노’인데다, 십대 임신이라는 소재가 비슷해 우리나라 영화 ‘제니, 주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소재에 제목까지 흡사한 탓에 영화 내용도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큰 오산. 영화 ‘주노’는 임신이라는 소재에 함몰되지 않고 소녀의 성장담을 담백하게 그린 수작이다. 무엇보다도 ‘쿨’한 감각으로 녹여낸 관계론과 가족관이 산뜻하다.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할 줄 아는 독립적인 소녀 주노를 통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는 ‘십대임신’을 인생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2008년 개봉해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영화는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을 비롯,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고루 받은 나름 화제작이다. 스트리퍼 출신 작가 디아블로 코디의 재기발랄한 각본에, 주노 역을 맡은 ‘엘렌 페이지’와 블리커 역의 ‘마이클 세라’의 개성 넘치는 연기가 더해진 수작. 게다가 음악까지 좋다. 주노의 감독 ‘제이슨 리트먼’이 엘렌 페이지에게 주노가 어떤 음악을 들을 것 같으냐 물었더니, 엘렌이 자신이 즐겨듣던 ‘Kimya Dawson(킴야 도슨)’과 그녀의 밴드 ‘The Moldy Peaches(몰디 피치스)’의 음악을 들려줬고 단박에 감독의 허락을 얻어냈다고 한다. 그렇게 뉴욕의 인디뮤지션 킴야 도슨이 주노의 OST 전반을 담당하게 됐다.
사실 처음에 감독이 생각한 주노의 음악취향은 글램락(19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장르.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면서 극적으로 과장된 화려함이 특징). 하지만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주변의 평가 때문에 방향을 바꿨다. 이후 Yo La Tango(요 라 탱고)에게 음악을 맡기려 했으나, 킴야 도슨의 곡이자 영화 엔딩곡으로 쓰인 ‘Anyone Else but you’를 듣고 나서 그녀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는 탁월했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산뜻한 영화의 분위기와 빼어나게 잘 어울리는 주노의 OST는 수많은 매체가 칭찬한 수작으로 남았다.

어느 가을 저녁.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멍하니 서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주스를 들이킨다. 아이는 한 잔 한 뒤, 어떤 남자애와의 뜨거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윽고 짖어대는 개에게 입 닥치라 외치며 쏘아보는 까칠함. 하지만 다시 상념에 빠져드는 무표정이 왠지 모르게 사랑스럽다. 한 성격 할 것 같은 그녀는 곧 심드렁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걷는다.

구성진 보컬과 컨추리 풍 정겨운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걷는 그녀, 주노. 조금은 참담한, 약간은 넋이 나간 표정과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Barry louis Polisar의 “All I want is you". 생소한 이름의 이 뮤지션은 동화작가이자 동요를 만드는 싱어송 라이터다. 세서미 스트리트를 위해 곡을 쓴 독특한 이력에 걸맞게 명랑한 멜로디에 아기자기한 가사가 경쾌하다. 하지만 이 경쾌함은 주노의 현실과 대조적이라 흡사 블랙 코미디 같다. 사실 현재 열여섯 살 주노의 인생국면은 총체적 난국. 고풍스러운 골동품 의자에서의 뜨거운 한 순간, 그 결과는 기적의 홀인원이었다. 임신테스트기 진단창엔 ‘사악한 핑크색 십자가’ 표시가 떠 있다. 충격에 휩싸여 엄청난 양의 주스를 마셔댄 뒤,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세 번이나 테스트했지만 결과는 변함없다. 아니, 이..임신테스트기 양반, 거짓말 마시오!! 내.. 내가 임신이라니!

이러저러한 역경의 계절을 지나 겨울. 한껏 부른 배의 주노. 매일 입고 다니던 티셔츠는 이제 배를 가릴 수 없을 만큼 작아졌다. 주노는 그동안 가족과 친구들에게 임신 사실을 직접 고백했고, 아이를 입양할 부모도 찾아냈다. 이 중대한 결정과 역경의 시간 동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우리의 주노는 많은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 아, 그렇담 애 아빠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그냥 늘 그렇듯 열심히 학교엘 다녔다. 주노의 인생에서 친구 겸 애인을 맡고 있던 남자아이 폴리 블리커. 주노의 첫 경험 상대로 지목된 착한 찌질이다.

한겨울의 블리커는 여전히 운동장을 뛴다. 친구들이 블리커에게 주노의 임신사실을 물으면 수더분하게 그렇다 답한다. “너 이제 아빠 되니까 수염 길러야겠다” 하고 놀리면 블리커는 “응, 근데 아직 수염 안나” 하고 웅얼거린다. 주노는 부른 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학교에 다닌다. 두 십대가 그들의 위기를 대하는 담담한 태도가 돋보이는 이 장면에서 Velvet underground의 'I'm sticking with you'가 흐른다. 전설적 밴드 Velvet underground의 프론트 맨, 일흔이 넘은 현재까지도 식지 않는 창작열을 자랑하는 뮤지션 Lou Reed의 곡. “나 너한테 꼭 붙어있을래. 왜냐하면 난 풀로 만들어졌으니까! (I'm sticking with you, Cause I'm made out of glue)” 동요처럼 단순한 멜로디에 사랑을 고백하는 귀여운 가사가 산뜻하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큰일을 겪고 있긴 하지만 사실 주노와 블리커는 겨우 열여섯. 이제 막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사춘기가 아닌가. 임신이라는 특수상황은 상황이지만, 소년소녀의 감정들은 여전히 미묘하고 풋풋하다. 귀여운 풋사랑이 좀 과하게 ‘쿨’해 보이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 학교 친구들의 뒷담화, 어른들의 손가락질, 선생님들의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도 당당하게 일상을 산다. ‘임신’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바꾼 건 당사자인 주노와 블리커가 아니라 세상의 인식과 시선들 뿐.

주노는 아이를 입양할 부모를 직접 골랐다. 그녀다운 담대한 결정이었다. 무가지에서 찾아낸 부부 마크와 바네사.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게다가 아이의 양아버지가 될 마크는 무지 ‘쿨’했다. 한 때 밴드를 꿈꿨던 과거, 독특한 음악취향과 슬래셔(살인 장면이 대거 나오는 높은 수위의 장르)무비에 대한 애정까지. 그야말로 주노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에겐 아이의 양아버지가 생김과 동시에 든든한 공감과 속 깊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근데 이게 좀 묘하다. 어른이라는 든든함, 공감대가 만든 유대감. 내 자식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긴 한데, 분명 사랑은 아닌데, 자꾸 기대고 싶어진다. 졸업댄스파티 파트너 문제로 블리커와 다툰 어느 날도 그랬다. 주노는 알 수 없는 서글픈 마음에 그의 집을 찾았다. 집에서 가져온 음악을 틀었는데, 우연찮게도 그 옛날 마크가 졸업댄스파티에서 춤 춘 노래란다. 묘한 공감과 위로의 분위기 속에서 둘은 그 옛날 그 노래를 틀어놓고 서로에게 기대어 춤춘다.

전주의 나른한 기타연주와 향수 짙은 오르간 멜로디가 흡인력 있는 곡, Mott the Hoople의 "All the young dude". 글램락 황금기였던 70-80년대 곡으로 당시 최고구가를 달리던 데이빗 보위가 프로듀스한 곡이다. 글램 시대의 게이 이야기를 담은 노랫말 덕에 지금도 프레디 머큐리 추모공연이나 데이빗 보위 공연에서 들을 수 있는 명곡. 한 때 락스타를 꿈꿨던, 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마크 캐릭터에 딱 맞는 선곡이다. 임신과 입양이라는 특수상황,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변화들, 나이와 역할. 그 모든 간극을 뛰어넘은 주노와 마크의 우정은 Sonic Youth로부터 시작했고, Mott the Hoople와 함께 종지부를 찍는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주노는 많은 위기 앞에 씩씩했지만, 사랑과 관계에 있어선 아직 순진했다. 마크와 주노의 유대감은 달콤했지만 그들에겐 각자의 삶과 관계들이 있었다. 오래된 커플 마크와 바네사, 완벽해 보였지만 그 완벽을 위해 스스로를 재단하고 끼워 맞춰야 했던 관계다. 소위 ‘성숙한 관계’란 대개 그렇게 유지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완벽한 부부에게 딱 하나 없는 게 있었다.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아니다. 깎고 잘라내 억지로 맞추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바로 이 점에서 균열이 생겼다. 만삭의 주노는 자신의 아이가 입양될 가정이 깨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만다. 마크가 바네사를 떠나면서 관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한 환상도 동시에 깨졌다. 주노는 잠시, 관계와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지킨 어떤 사랑들이 있었다. 세상의 편견과 맞서며 부른 배를 안았던 몇 번의 계절.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주노만큼 쿨한 아버지는 말한다. “최선의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찾는 거야.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네가 잘생겼을 때나 못생겼을 때나. 진짜 네 짝이라면 네 엉덩이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할거야.”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주노는 블리커의 집으로 달려간다.

주노는 사탕을 좋아하는 블리커를 위해 블리커네 집 우체통을 사탕으로 가득 채웠다. 깜찍한 선물에 놀라는 블리커의 표정이 더 깜찍한 이 귀여운 장면의 BGM은 주노와 블리커만큼 사랑스럽다. 영화 ‘주노’의 OST를 담당한 킴야도슨이 Antsy Pants와 함께한 “Tree hugger". 사뭇 진지하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는 영화의 매력이 배가된 건 킴야의 담백한 목소리 덕이 크다. 노래의 화자를 주노라 상상해도 큰 어긋남이 없을 만큼 훌륭한 선곡이기도 하다.

열여섯 주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고, 그 덕에 보다 명민한 대처가 가능했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 또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했다. 홀로 겪었다면 과히 힘들었을지도 모를 임신의 경험, 쿨한 그녀와 쿨한 그녀의 사람들은 모두가 힘들었을 수도 있는 상황을 유쾌하게 이겨냈다. 블리커도 마찬가지다. 블리커는 단 한 번도 그의 상황으로부터 도망가려하지 않았다. 종종 주노가 튕기긴 했어도, 블리커는 늘 곁에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바라볼 줄 알았다. 다만 늘 그들의 관계와 평행선을 그리던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이들은 예기치 못한 임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과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늘 곁에 있던 사랑들을 깨달았다. 흔히 임신이 주는 축복은 두 사람 사랑의 결실인 ‘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임신이 주는 축복과 결실은 변함없는 믿음과 견고한 관계의 확인일 것이다. 주노는 부른 배의 시간만큼 자랐고, 곧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타인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그 모든 배부른 계절이 지나고 새로운 여름을 맞이한 주노와 블리커. 마지막 씬에서 배우 엘렌 페이지와 마이클 세라가 직접 연주하고 부른 'Anyone else but you'는 킴야 도슨의 곡이다. 두 사람이 노래하는 장면을 본 킴야 도슨, 자신의 원곡보다 풋풋하고 귀엽다며 연신 칭찬했다고. 주노와 블리커가 마주보며 부르는 마지막 노래는 영화 ‘주노’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강력한 한 방이다. 그것도 아주 귀엽고 산뜻한.

주노 OST

평단의 지지와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는 영화 ‘Juno’ 영화의 감동과 재미를 증폭시키는 영화음악 [Juno OST] 미국의 국민 여동생으로 자리매김한 ‘엘렌 페이지’가 직접 추천한 뉴욕 출신 10대 밴드 ‘몰디 피치스’와 ‘몰디 피치스’의 멤버로도 활동한 ‘킴야 도슨’이 참여. 엘렌 페이지와 마이클 세라가 직접 기타를 치며 부르는 ‘Anyone Else But You’ 수록곡들이 주인공 소녀 ‘주노’ (엘렌 페이지)의 심정과 관계, 스토리들을 대변하는 노랫말과 감각적인 분위기로 영화에 한층 더 몰입을 할 수 있게 만든다. 톡톡 튀는 10대 언어를 녹여낸 영화답게 영화 음악의 노랫말도 10대의 정서를 생생하게 표현하며 감성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