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4 '500일의 썸머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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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짙게 남은 음악 4 '500일의 썸머 OST'

2012.05.03

스미스라면 사춘기풍의 냉소와 비관을 산뜻하게 노래하기론 최고가 아닌가. 평생을 스미스 노래처럼 살아온 톰, 썸머로부터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운명으로도 해석 가능한 우연의 찰나, 사랑은 이미 시작됐다. 톰은 그녀가 이 운명적 러브스토리에 합류하기만을 기다린다. 엄청 찌질하고 소심한 방식으로, 일테면 썸머가 지나갈 때 일부러 스미스의 음악을 트는 식. 자신의 적극적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며 기다리지만 아니나 다를까, 관심 없다는 듯 스쳐가는 썸머. 뜻대로 되지 않으니 우울과 절망이다. 하지만 그 좌절감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을 빛은 있다(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한 번 당겨진 희망의 불씨는 쉽사리 꺼지지 않기 마련이고, 톰은 이미 썸머가 운명의 그녀임을 확신했다.

가라오케에서의 회식. 우연인지 운명인지, 썸머는 톰의 테이블에 합석한다. 그녀가 많고 많은 테이블 중 자신의 테이블에 앉다니! 말을 섞어보니 솔직하고 담백해 매력까지 넘쳐라. 게다가 연애엔 관심 없단다. 사랑은 그저 판타지에 불과하다며 던지는 냉소. 남자 많을 것 같던 그녀, 의외로 쓸쓸한 구석까지 있다. 운명론자 톰에겐 그녀의 불신을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불신자 썸머를 구원할 용사의 기세로 얼큰하게 취한 톰, 픽시스의 'Here comes your man'을 부른다. 알콜과 희망과 사랑 가득한 표정으로 힘차게 외치며. ‘오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당신의 남자가 이제 곧 가요, 간다고요!(You'll never wait so long, Here comes your man)’

톰은 썸머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 목에 있는 하트모양 점, 말하기 전 입술을 적시는 버릇까지. 패트릭 스웨이지의 ‘She's like the wind'를 들으며 친구에게 고백한다. “이 노래는 그녀의 테마야.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이 너무 좋아.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고, 뭐랄까, 삶이 가치 있게 느껴져.” 친구는 지적한다. “징조가 매우 좋지 않군.”

아름다운 발라드 ‘She's like the wind’는 80년대 영화 ‘더티댄싱’의 OST 수록곡이다. 영화의 인기만큼 사랑받은 이 곡은 빌보드 탑100 3위를 기록한 히트넘버. ‘더티댄싱’의 주연을 맡은 패트릭 스웨이지가 작곡과 작사에 참여하고 직접 불렀다. 여인에 대한 애끓는 사랑을 노래한 가사에 공감했는지, 톰은 이 노래를 썸머의 테마로 여긴다. 하지만 세상 가장 달콤한 러브 송이었던 썸머의 테마는 이별 후, 우주를 통틀어 가장 형편없는 곡이 된다. 톰은 진지한 관계를 원치 않는 썸머의 가벼움을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들은 종종 참을 수 없는 염증으로 변모한다, 그것도 아주 쉽게.

썸머는 대뜸 말했다. ‘이제 우리 그만보자.’ 덧붙인 확인사살. ‘넌 여전히 내 최고의 친구야!’. 연인이라 구분지은 적은 없었지만 정황상 연인이었다. 무엇보다도 톰에게 그녀는 ‘유일’했다. 톰은 극심한 멘탈붕괴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더는 볼 수 없던 썸머를 우연히 회사 동료 결혼식 가는 길에 만났다. 다시 만난 썸머는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함께 춤도 췄다. 게다가 썸머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도 받았다. 썸머와 다시 시작하리라는 기대감에 부푼 톰에겐 이미 해피엔딩의 시나리오가 전부.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하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톰은 수많은 손님 중 하나일 뿐. 운명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썸머는 톰을 위한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냥 ‘썸머’였다. 하지만 운명적 사랑을 믿던 톰은 자신의 운명적 스토리텔링에 썸머를 우겨넣었다. 세기의 연인일지도 모를, 적어도 톰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할지도 모를 그녀와의 러브스토리다. 진지해지길 원치 않는다던 그녀의 선언은 알고 있지만, 감정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톰이 직접 쓰고 주연을 맡은 러브스토리는 역시 실현되지 않는다. 톰의 운명론과 판타지가 산산이 부수어지는 장면에서 레지나 스펙터는 노래한다. 우리가 미리 써두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망한가, 한탄하면서.
‘이게 현실적인 씬이야. 나는 이 이야기의 영웅이니 구원받을 필요는 없어. 근데 모든 걸 가질 순 없었어. 세상 모두가 그래.’

톰은 때마다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이별의 징후들을 찾으려 매 번 돌아갔지만 이렇다 할 무엇도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언젠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가 흐르던 영화 '졸업'의 엔딩을 보며 하염없이 울던 썸머가 있었다. 톰은 그녀에게 왜 우는지를 물었고, 그녀는 자신이 바보 같아서 운다고 했다. 그녀의 눈물이 당황스러웠던 톰은 더 묻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나 매력적인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했지만, 그녀의 슬픔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 언젠가 썸머와 레코드 샵에 갔던 적이 있었다. 비틀즈 최고의 곡을 이야기하다가 썸머는 비틀즈 중 링고스타를 가장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톰은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면박을 줬다. 썸머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바로 그 점에서 링고스타를 좋아한다고 했고, 그건 전적으로 그녀의 취향이었다. 손을 잡으려 했지만 미묘하게 잡히지 않았던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언젠가. 이별통보 직전의 공기. 톰은 이별의 징후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저 일방적으로 통보 받았다고만 믿었다.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사소함을 비로소 발견한 날, 톰의 회상장면 뒤로 사이먼 앤 가펑클의 Bookends가 흐른다. 지나간 모든 것들에게 바치는 송가 같은 노래. 책의 말미쯤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미세한 균열들, 모르는 새 붕괴에 이르게 하는 실금들. 사실 톰은 있는 그대로의 썸머보다 선택적으로 기억된 썸머의 황홀함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행위 자체에 취해 그녀 자체보다는 판타지를 사랑했던 톰. 시간이 흘러 추억의 장소에서 재회한 썸머는 말한다. “톰, 운명과 사랑을 믿던 네가 옳았어. 그냥 난 너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야."

우연한 찰나에 시작되는 것이 사랑이고, 그 불가해한 그 매커니즘은 운명론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하지만 운명과 사랑에 대한 맹신, 혹은 불신은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도 한다. 톰이 그랬고, 썸머가 그랬다. 그래서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그게 바로 ‘썸머’다. 썸머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시기로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톰은 500일의 혹독한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아주 조금은 알게 됐다. 운명에 의해서든 우연에 의해서든, 쨌든 사랑은 계속될 것임을.

(500)일의 썸머 OST

모던락과 브릿팝을 좋아하는 톰의 극중 캐릭터가 반영되기라도 하듯 선곡도 그 비슷하다. 올 5월 한국을 찾는 모리씨(Morrissey)가 가사를 쓰고 노래했던 스미스(The Smiths)의 곡이 두 곡 실렸다. 러시아 핏줄의 싱어송라이터 레지나 스펙터(Regina Spektor)는 이 OST에 세 곡이나 참여했다. 그 중 한 곡은 픽시스(Pixies)의 'Here comes your man' 커버. 픽시스의 원곡과는 달리 상큼하고 아기자기하다. 이들 외에도 도브스(Doves), 파이스트(Feist),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의 히트넘버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