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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재즈의 총체적인 분화: 1960년대
1950년대가 비밥 이후 모던재즈의 다양한 스타일을 낳았다면 '60년대의 재즈는 모던재즈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그 이후의 분화를 보여주었다. 이제 재즈는 상이하면서도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음악으로 서서히 변모하고 있었다. LP와 스테레오 녹음-재생 방식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음반 시장 규모는 급성장했고 재즈 음반 시장도 함께 커졌는데 그러한 현상 속에서 대형 음반사들이 재즈 시장에 뛰어드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비밥의 전통을 이어받은 모던재즈는 '60년대에도 굳건히 재즈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옥타브 사운드'를 기타에 구현한 웨스 몽고메리는 재즈 기타의 혁명을 불러왔다. 동시에 해먼드 오르간으로 재즈에 새로운 사운드를 몰고 온 지미 스미스 역시 '60년대를 대표하는 재즈 연주자였다. 버브 레코드는 오르간과 기타 두 악기의 대표주자를 묶어 '60년대의 상징적인 재즈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올스타 재즈 콘서트인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TP)'의 일원이었던 엘라 피츠제럴드는 '60년대에도 여전히 '재즈의 영부인'이었다. 1960년 그는 베를린에서 신청곡으로 받게 된 쿠르트 바일의 명곡 'Mack the Knife'를 가사를 잊은 채 즉흥적으로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R&B의 대표적 가수로 손 꼽혔지만 재즈에 뿌리를 두고 있던 레이 찰스는 퀸시 존스의 편곡과 재즈 빅밴드의 반주로 그의 짙은 블루스 노래와 오르간 솜씨를 들려주었다.
1960년대 대중음악에서 소울의 인기는 재즈에서 오르간과 색소폰의 인기를 부채질했다. 그 무렵 트윈 테너를 전면에 세운 재즈 밴드가 등장했는데 에디 '락조' 데이비스와 조니 그리핀의 밴드, 진 애먼스와 소니 스팃 밴드가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거칠면서도 현란한 테너 사운드로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모던재즈가 재즈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제 거장으로 불리게 된 비밥 1세대들의 역할 때문이었다. 디지 길레스피는 새로운 편곡자 랄로 시프린을 영입해 그의 빅밴드 사운드에 혁신을 가져왔으며 아트 블레이키 역시 웨인 쇼터, 시더 월턴 등 젊은 하드 바퍼들을 영입해 새로운 작품과 스타일을 선보였다. 약물 문제로 덴마크로 이주했지만 덱스터 고든은 블루노트 레코드를 통해 탁월한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그가 다시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62년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한 텔로니어스 멍크는 여전히 그의 기발한 신곡들을 발표하며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다. 한때 멍크와 함께 연주했던 소니 롤린스는 '50년대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연주의 매너리즘을 깨닫고 3년간 은둔했다가 '62년 복귀하며 RCA에서 앨범 [The Bridge]를 발표했다.
(뉴욕 윌리엄스버그 다리에서 홀로 연습하다가 재즈계로 복귀한 소니 롤린스)
JATP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해 온 오스카 피터슨은 '59년 자신의 트리오를 피아노, 베이스, 드럼으로 바꾸고(그 전에는 드러머 대신 기타리스트를 기용했다) '60년대의 대표적인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테크닉을 활용해 만든 곡 'Hymn for Freedom'을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넬슨 만델라에게 헌정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재즈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듀크 엘링턴도 급변하던 재즈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모던재즈의 대표적인 두 리듬섹션 찰스 밍거스와 맥스 로치를 초대해서 트리오 편성으로 걸작 [Money Jungle]을 완성했다. 하지만 역시 그의 음악은 분령은 빅밴드 편성이었다. 거의 30년 동안 그의 밴드에서 편곡과 작곡을 담당했던 빌리 스트레이혼이 타계하자 그는 스트레이혼의 작품들만을 모아 그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을 녹음했다.
그 무렵에 새로운 빅밴드가 출연했다.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 출신의 트럼펫 주자 새드 존스 그리고 스탠 켄턴, 제리 멀리건 빅밴드 출신의 드러머 멜 루이스는 매주 월요일(월요일은 다른 클럽들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휴일이다) 클럽 빌리지 뱅가드에서 빅밴드 공연을 갖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 밴드에는 뉴욕 최고의 음악인들이 결집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60-'70년대 뉴욕을 대표하던 빅밴드의 시작이었다.
1950년대 말 브라질의 젊은 음악인들이 삼바 리듬을 기본으로 만든 보사노바는 '60년대를 넘어서면서 북미지역으로 옮겨졌다. 몇몇 재즈 연주자들은 이 음악을 바로 흡수했지만 그 흐름의 최대 수혜자는 스탠 게츠였다. 버브 레코드의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는 스탠 게츠와 주앙 지우베르투를 비롯한 브라질 음악인들을 하나의 밴드로 묶어 녹음을 시도했는데 여기에 실린 'The Girl from Ipanema'는 전 세계적인 보사노바의 열풍을 몰고 왔다.
이 리듬은 금세 재즈로 퍼져나갔다. 하드밥 트럼펫 주자 케니 도햄은 아름다운 'Blue Bossa'를 작곡하고서 그가 사이드맨으로 참여한 조 헨더슨의 첫 앨범 [Page One]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역시 하드밥의 기수였던 호러스 실버는 카보베르데 군도(서아프리카의 이곳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포르투갈인들은 이곳의 사람들을 그들의 또 다른 식민지인 브라질로 강제 이주시켰다) 출신의 아버지에게 바친 곡 'Song for My Father'에서 삼바 리듬을 사용해 이례적인 재즈 히트곡을 만들었다.
(1963년 [Getz/ Gilberto] 녹음현장: (좌로부터) 지우베르투,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빙, 게츠)
또 다른 라틴 리듬으로 푸에르토리코계 사람들이 즐기던 부갈루 리듬은 '60년대 소울 음악을 젊게 만들고 있었다. 이 현상을 지켜본 도널드 버드 밴드 출신의 허비 행콕은 '62년 자신의 재즈곡 'Watermelon Man'에 즉각 반영했다. 아트 블레이키와 재즈 메신저스 출신의 리 모건 역시 이 리듬을 응용해 '63년 'The Sidewinder'을 발표해 대단한 호흥을 얻었다. 이러한 음악을 사람들은 소울재즈라고 불렀다. '60년대 중반부터 소울재즈의 히트곡은, 비록 연주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관심을 얻었다. 램지 루이스 트리오의 'The 'In' Crowd'(1965), 캐넌볼 애덜리 퀸텟의 'Mercy Mercy Mercy'('66), 루 도널드슨의 'Alligator Bogaloo', 케니 버럴의 'Chitlins Con Carne'(이상 '67)는 그 대표곡들이다.
이미 1950년대 말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번스 등에 의해 비밥의 즉흥연주 방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밥의 오랜 전통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즉흥연주 방식뿐만이 아니라 작곡, 편곡의 기법 등 다양한 차원에서 벌어졌다. 평론가들은 이 다양한 현상을 통틀어 포스트 밥이라고 이름 붙였다.
찰스 밍거스는 마치 대략의 대본으로 연극을 만들어 가듯이 리허설을 통해 음악을 구체화하면서 흑인 교회의 예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조지 러셀은 지속적으로 리디언 음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작곡을 전개했다. 밍거스는 발레 음악 [The Black Saint & Sinner Lady]를 '62년에 녹음했다. 밴드의 편성은 빅밴드에 가까웠지만 악보에 의존하지 않는 워크숍 형태의 작곡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길 에번스 역시 마일스 데이비스와 추구하던 모덜 재즈를 빅밴드 편성에서 시도하고 있었다. 색소포니스트이자 작곡, 편곡자였던 올리버 넬슨도 마일스가 그랬던 것처럼 블루스를 모덜 재즈의 입구로 활용하고 있었다.
빌 에번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트리오로 활동하면서 비밥 피아노 트리오의 형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앙상블은 상호 교감을 중시했고 솔로의 방식도 코드 전개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의 베이스 주자 스콧 라파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당시 특별했던 그의 트리오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빌 에번스는 트리오 편성을 중단한 채 다른 편성으로 상호교감의 앙상블을 추구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연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음악적 응답을 더빙 녹음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과거 레니 트리스타노의 피아노 더빙 녹음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기도 했다.
해밀턴, 밍거스의 사이드맨이었던 에릭 돌피는 잠시 자신의 퀸텟을 조직해 최고의 연주를 들려 주었다. 이 밴드에는 부커 리틀(트럼펫), 맬 월드런(피아노) 등 개성 강한 최고의 연주자들이 함께했다. 돌피는 자신의 음악을 찰리 파커의 계승자 혹은 반역자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이듬해에 돌피가 잠시 몸담았던 맥스 로치 밴드 역시 비밥과 그 바깥의 영역 중간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 있었다. 찰리 파커의 드러머였던 그는 '60년대에 들어 흑인 인권 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보컬리스트 애비 링컨의 노래로 그 점을 명확히 전달했다.
'50년대 한동안 유럽에서 활동했던 스탠 게츠는 미국으로 복귀하면서 '61년(그러니까 보사노바를 연주하기 전)에디 소터의 작품으로 현악 앙상블이 더해진 실험적인 스타일의 재즈를 구사했다. 한때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기수로 불렸던 그는 평론가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 새로운 시도를 담은 [Focus]로 그가 얼마나 폭넓은 음악을 구사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였다.
드러머 치코 해밀턴은 연주자를 발굴함에 있어서 탁월한 심미안을 갖고 있었다. 버디 콜렛, 에릭 돌피 이후 그는 색소폰과 플루트에 모두 능한 젊은 연주자 찰스 로이드를 찾아냈다. 그는 연주뿐만이 아니라 작곡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해밀턴 쿼텟에서 발표한 'Forest Flower'는 포스트 밥의 명곡으로 남게 된다.
돌피의 후임으로 밍거스 밴드에서 연주했던 롤랜드 커크 역시 포스트 밥 스타일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었다. 만젤로, 스트리치와 같은 변형된 색소폰뿐만 아니라 플루트도 완벽하게 다뤘던 그는 흑인 음악의 뿌리와 첨단을 오고 가며 흑인음악의 장르를 나누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포스트 밥의 주역들은 역시 마일스와 콜트레인 그리고 그들의 사이드맨이었다. 1963년과 '64년에 새로운 마일스 퀸텟에 입단한 허비 행콕과 웨인 쇼터는 새로운 화성과 형식으로 새로운 재즈 스탠더드의 모습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의 독창성이 전면에 부상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E. S. P.]는 제목 그대로 다섯 연주자들의 초능력과도 같은 교감을 담은 작품이었다. 훗날 허비 행콕 후임으로 마일스와 연주하게 되는 스탠 게츠 밴드 출신의 칙 코리아도 이미 유사한 형식의 곡을 만들고 있었다.
1960년부터 그의 사중주단을 통해 'My Favorite Things'를 파격적으로 연주한 존 콜트레인은 모덜 재즈의 지평을 넓히고 있었다. 그 흐름은 1964년 작 [A Love Supreme]에서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후 콜트레인은 모던재즈의 틀에서 더 벗어난 프리재즈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를 두고 그의 추종자들은 갈리기 시작했다.
(존 콜트레인 쿼텟: (좌로부터) 엘빈 존스, 매코이 타이너, 콜트레인, 지미 개리슨, 1963년)
아치 솁은 콜트레인의 음악적 전 과정을 모두 흡수한 음악인이었다. 그의 음악에서 콜트레인의 모든 음악은 중요한 소재였다. 반면에 콜트레인 만년에 함께 연주했던 색소포니스트 파로아 샌더스는 콜트레인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음악적 형식에서는 자유를 추구했다. '67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콜트레인은 모던재즈와 프리재즈 모두에 영향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이제 비밥의 유산은 사라졌고 모던재즈의 틀은 무너졌다. 그중에서 오넷 콜먼과 앨버트 아일러는 찰리 파커와 존 콜트레인이 1940년대, '50년대에 남긴 유산들과 단절하면서 재즈의 자유를 완성하려고 했다. 오넷 콜먼은 이미 '60년에 두 개의 사중주단이 집단적으로 즉흥연주를 펼치도록 함으로써 자신에게 남아 있던 버드의 유산을 완전히 지웠다. 2년 뒤 유럽에서 자신의 첫 녹음을 남긴 앨버트 아일러는 이전에 자신이 미국 시절에 들려주었던 R&B 풍의 색소폰 스타일과 완전히 결별해 있었다. 이들이 부르짖었던 음악적 자유는 당시 아프리카계 사회의 화두였던 자유와 일맥상통했다.
(플라스틱으로 제조된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는 오넷 콜먼)
'6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이제 더 이상 즉흥연주는 재즈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특히 1950년대 일렉트릭 블루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국의 젊은 음악인들은 블루스와 재즈 그리고 록을 한 음악 안에서 소화하고 있었다.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를 환대한 곳이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란 점은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60년대 초부터 런던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 존 매클러플린이 '69년에 처음으로 발표한 음악은 적어도 그들에게 블루스, 재즈, 록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미 지미 헨드릭스의 출연으로 충격을 받은 마일스 데이비스는 '68년도부터 전기 사운드와 록의 비트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가 '69년에 녹음한 [Bitches Brew]는 그의 말대로 '이제 기존의 재즈가 죽었음'을 선포한 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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