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s 재즈] 퓨전의 시대, 새로운 레이블
에디션m
'이런 노래를 뭐라고 하지?'
'이 노래는 어떻게 유행하게 됐을까?'
우린 종종 음악을 들으며 장르, 아티스트, 혹은 노래의 이면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궁금해하죠. 또는 최애곡과 비슷한 노래, 최애 밴드와 비슷한 가수에 목말라 하기도 하고요. 하나의 음악을 접하면 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게되는 독창적 탐구형 리스너를 위해, 멜론과 전문가가 힘을 모아 대중음악 지침서를 발행합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에디션m에서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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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하는 재즈
1970년대의 재즈는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였다. 재즈의 인접 음악인 R&B, 록 등과 뒤섞이는가 하면 유럽에서 제작된 재즈 앨범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앨범들과는 상이한 성격을 들려주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재즈의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걱정했지만 이제 재즈는 더욱 다양한 양식의 음악으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1960년대 이미 시작된 재즈의 퓨전현상은 '70년대 들어서 재즈의 완전한 주류가 되었다. 대형 음반사들은 기존의 재즈에서 눈을 돌려 새롭게 등장하는 퓨전 재즈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퓨전은 그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 음악의 선두주자였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60년대 후반에 그가 시작했던 노선을 계속 유지하며 재즈와 '60-'70년대의 록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것은 다분히 지미 헨드릭스 풍의 록에 대한 마일스의 응답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Sivad'에서 기타를 연주했던 존 매클로플린은 곧 자신의 재즈 록 밴드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그의 현란한 기타 연주를 선보였다. 여기에는 재즈와 록 외에도 인도 음악의 영향이 곁들여 있었다.
1960년대까지 마일스의 빅밴드 편성 음악에서 편곡과 지휘를 담당했던 길 에번스의 '74년 앨범 [Plays the Music of Jimi Hendrix]는 지미의 일렉트릭 기타가 결국에는 과거의 빅밴드 사운드를 대체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작품이었다.
반면에 재즈는 '70년대의 R&B를 만나 소울 재즈 혹은 재즈 펑크(funk)란 새로운 사조를 낳았다. 이미 '70년부터 마일스와 경쟁적으로 일렉트릭 사운드와 록의 요소를 받아들였던 도널드 버드는 '72년 과거 모타운 레코드의 프로듀서였던 알폰소 미젤과 보컬리스트인 래리 미젤 형제를 만나 펑크 사운드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렇게 발표된 앨범 [Black Byrd]는 새롭게 출범한 블루노트 레코드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도널드 버드 밴드의 피아니스트로 시작해서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를 거치며 재즈의 선두에 서게 된 허비 행콕 역시 재즈와 펑크 사운드를 접목했다. 그가 새롭게 결성한 그룹 헤드 헌터스의 첫 앨범은 'Chameleon'을 통해 소울 재즈의 대표작이 되었다.
1973년 첫 앨범을 발표한 허비 행콕의 밴드 헤드 헌터스
반면에 자코 패스토리우스는 재즈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일렉트릭 베이스 연주자였다. 그는 데뷔 앨범에서 R&B 보컬팀 샘 & 데이브를 초대해 소울풀한 넘버 'Come On, Come Over'를 발표했는데 이처럼 펑키한 리듬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의 연주는 이후 그가 속한 그룹 웨더 리포트의 음악적 방향을 바꿔 놓았다. 초기에 마일스 데이비스의 퓨전 노선을 따랐던 이 팀은(당연하게도 이 팀의 두 리더는 마일스 밴드 출신의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였다) 자코 이후 보다 R&B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고 그들의 명곡 'Birdland'는 그 무렵에 탄생했다.
역시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 출신의 건반주자 칙 코리아는 그가 속한 가계(家系)의 뿌리인 스페인의 음악 플라멩코를 재즈와 접목해서 명곡 'Spain'을 만들었다. 이후 그의 음악은 록, 클래식 등 여러 음악을 흡수하여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아트 블레키와 재즈 메신저스 출신의 플뤼겔호른 주자 척 맨지오니는 부드러운 팝 성향의 재즈곡 'Feels So Good'으로 미국 싱글 순위 4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바야흐로 퓨전의 시대였다.
재즈가 기존의 모습에서 급변하자 이 흐름을 반영한 전문적인 독립 음반사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베들레헴, 임펄스, 버브에서 경력을 쌓은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는 1967년 A&M 레코드 산하 레이블인 CTI 레코드를 설립했고 1970년에 독립하여 독자적인 경영에 나섰다. CTI는 프레디 허버드, 스탠리 터런틴 등 기존의 일급 연주자들의 명반을 제작했지만 이 레이블의 진정한 개성은 조지 벤슨, 데오다토,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등 새로운 재즈 스타들의 음반을 통해 발휘되었다.
조지 벤슨은 그가 '60년대에 주로 연주했던 오르간 트리오 편성을 '70년대 스타일로 발전시킨 앨범 [Beyond the Blue Horizon]으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고 건반 연주뿐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편곡 솜씨를 갖춘 데오다토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을 편곡한 'Also Sprach Zarathustra'의 화려한 사운드를 앞세워 앨범 [Prelude]를 미국 앨범순위 2위에 올려놓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는 소울 재즈를 대표하는 색소포니스트로 부상했는데 앨범 [Feels So Good]에서 건반 주자 밥 제임스의 오케스트라 편곡은 CTI의 독특한 사운드를 대변했다.
미국의 CTI가 있었다면 '70년대 유럽 재즈에는 ECM이 있었다. 유럽 재즈 레이블의 역사는 이미 '3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유럽 재즈만의 독자적인 소리와 개성은 ECM을 통해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 독일 뮌헨에서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가 설립한 이 음반사는 맨 처음 아메리카 대륙의 연주자들과 주로 녹음을 남겼다. 하지만 이 연주자들이 ECM에서 발표한 녹음들은 기존의 미국 음반사들과의 음반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국의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와 드러머 배리 앨철 그리고 마일스 밴드 출신의 영국 베이시스트 데이브 홀랜드는 아방가르드 트리오 서클을 결성해서 ECM과 녹음했고 홀랜드는 미국 음반사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실험적인 연주자들과 함께 걸작 [Conference of the Birds]를 ECM에서 완성했다.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폴 블레이는 당시까지도 미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두 여성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아넷 피콕의 작품으로 명만 [Open To Love]를 녹음했다.
폴 블레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ECM을 통해 구현한 피아니스트는 키스 자렛이었다. 그는 독일 쾰른에서 가졌던 자신의 즉흥 피아노 독주회를 녹음해 기념비적인 [The Koeln Concert]를 발표했고 연주와 소리 모든 면에서 재즈 피아노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게리 버턴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당시 스물두 살의 경이로운 연주자 팻 메시니가 ECM에서 녹음한 그의 첫 앨범 [Bright Size Life] 역시 기존의 미국 재즈 음반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감수성을 담은 걸작이었다.
1970년대의 키스 자렛
하지만 ECM이 가진 또 다른 가치는 유럽의 재즈 음악인들을 발굴한 점이었다. 노르웨이의 목관 연주자 얀 가바렉과 스웨덴의 피아니스트 보보 소텐손은 ECM 사운드의 중요한 기초가 북유럽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주자들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50년대부터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트럼펫 주자 케니 휠러는 마일스 밴드 출신의 탁월한 리듬 섹션(키스 자렛, 데이브 홀랜드, 잭 드조넷)과 더불어 완전히 색다른 앨범 [Gnu High]를 역시 ECM을 통해 녹음했다.) '70년대 이전에 미국 연주자의 사이드맨이었던 독일의 베이스 주자 에버하르트 베버 역시 ECM 레코드와 녹음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70년대 중반 그가 결성했던 그룹 칼러스의 앨범들은 유럽의 재즈 음악가 혹은 ECM이 아니라면 만들어 낼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메인스트림 재즈는 역설적이게도 '70년대에 비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절에 이 주류의 재즈가 거의 사라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대형 음반사와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 오랜 시간 축적되었던 재즈의 전통은 새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재즈 공연 수요가 '7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이를 계기로 솔리드 스테이트, MPS, 뮤즈, 파블로 등 메인스트림 재즈를 위한 독립 음반사들이 '60년대 후반부터 계속 생겨났다.
새드 존스-멜 루이스 재즈 오케스트라는 클럽 빌리지뱅가드에서 정기공연을 가지며 당대의 빅밴드로 인정받으며 1970년 그들의 명곡 'A Child is Born'을 발표했다. 맥스 로치, 아트 블레이키, 디지 길레스피, 카멘 맥레이의 피아니스트였던 레이 브라이언트는 '72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인상적인 독주회로 음악 활동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 리 모건 밴드를 거친 피아니스트 시더 월턴은 '70년대부터 색소포니스트 클리퍼드 조던과 함께 활동하며 우직하게 하드 밥을 지켰는데 당시 그가 소규모 재즈클럽에서 녹음한 라이브 녹음들은 한결같이 명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타리스트 조 패스는 약물과의 오랜 싸움 이후 사이드맨으로서의 활동으로 마흔이 넘긴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73년 파블로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경이로운 일렉트릭 기타 독주 앨범 [Virtuoso]를 발표하면서 일약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손꼽히게 되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출신의 트럼펫 주자 클라크 테리는 다양한 레코딩 세션에서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이미 50대에 들어선 '70년대에 그의 꿈이었던 빅밴드를 결성했다. 비록 그의 빅밴드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에 그는 빅밴드와 함께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그의 유머 넘치는 스캣과 트럼펫 솔로를 들려주었다.
'왕'으로 불리던 재즈의 전설 베니 카터는 앞서 언급한 레이 브라이언트, 조 패스, 클라크 테리와 함께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TP)' 콘서트의 고정 멤버였다. 그의 동료들은 대부분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는 '70년대에도 여전히 기품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오스카 피터슨 역시 JATP의 주역이었다. 그는 '77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 열린 JATP 무대에서 그의 트리오의 신구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과 닐스-헤닝 오르스테드 페데르센을 동시에 초대해 피아노와 두 대의 베이스가 펼치는 전대미문의 명연주를 남겼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분위기는 점차 바뀌고 있었다. 퓨전의 선두에 섰던 허비 행콕과 웨인 쇼터가 프레디 허버드, 론 카터, 토니 윌리엄스(이들 중 프레디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60년대 중반 마일스 퀸텟의 멤버들이었다)와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자 언론은 '이제 재즈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 오중주단의 이름은 '매우 특별한 일회 연주(Very Special One Time Performance)'였지만 이들의 인기는 이 밴드의 해산을 오랫동안 보류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활동을 멈추었던 명인들의 복귀도 이어졌다. '50년대 말에 이어서 '69년부터 현장에서 또다시 모습을 감췄던 소니 롤린스는 '72년에 복귀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62년 미국을 떠났던 덱스터 고든도 '76년에 빌리지뱅가드 연주를 시작으로 미국에 돌아왔다. '69년 무대를 떠났던 아트 페퍼도 '75년 다시 무대에 복귀해서 '77년에 생애 처음으로 뱅가드 무대에서 연주했다. 덱스터와 아트는 모두 약물과의 오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60년대 말 메인스트림 재즈 음악인들과 계약을 만료했던 컬럼비아 레코드는 '70년대 말에 이르러 다시 그들에게 손을 건넸다. 호러스 실버, 덱스터 고든 밴드를 거친 트럼펫 주자 우디 쇼는 앨범 [Rosewood]를 발표하면서 '70년대에도 건재한 하드밥의 모습을 들려주었고 베테랑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는 피아니스트 지미 롤스와 함께 명작 'The Peacocks'를 발표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70년대를 끝으로 마지막 걸작을 남긴 재즈의 명인들도 있었다. 듀크 엘링턴(75세), 지미 러싱(70세), 찰스 밍거스(57세)가 모두 '70년대에 눈을 감았고, 명 트럼펫 주자 리 모건은 불의의 총격으로 같은 시기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생애 마지막에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72년에 이제 인생의 11년을 남긴 얼 하인스와 '77년에 생을 3년밖에 남기지 않은 빌 에번스도 '70년대에 만년의 명연주를 남겨 두었다.
모던재즈 쿼텟은 약 20년간의 활동을 끝으로 해산을 결정하고 '74년 마지막 음악회를 가졌다. 하지만 해산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팬들의 요청으로 그들은 '80년대에 재결성해서 멤버들은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 연주했다.
존 콜트레인의 '60년대 음악을 두고 일각에서는 '안티 재즈(Anti-Jazz)'라고 불렀지만 '70년대에 들어 아방가르드 재즈는 재즈의 일부분으로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콜트레인 쿼텟 출신의 피아니스트 매코이 타이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음악을 주목하며 재즈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앨범 [Sahara]는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미국의 프리재즈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72년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음악을 맡았던 아르헨티나의 테너 색소포니스트 가토 바비에리는 '73년부터 임펄스 레코드와 4부작 녹음을 시작했다. 이 녹음은 아직도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라틴 재즈의 등장이었다.
1969년 독립 음반사 '베트카'를 운영하기 시작한 보컬리스트 베티 카터는 그녀의 독특한 창법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녀의 나이 쉰 살이 되었을 때 녹음한 실황앨범 [The Audience with Betty Carter]는 그 오랜 노력의 결실을 맺은 작품이었다. 그녀를 통해 재즈 보컬은 진화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아방가르드 재즈는 뉴욕의 빌딩 다락 층에서 그들의 터전을 꾸리고 있다고 하여 평론가들은 '로프트 재즈'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재즈의 한 영역으로 인정받은 이 음악의 거장들은 '예술가'로서 공인 역시 획득하고 있었다. 오넷 콜먼은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대작 [Skies of America]를 발표했고 파로아 샌더슨과 샘 리버스는 여전히 아방가르드 재즈에 우호적이었던 임펄스 레코드에서 그들의 긴 즉흥연주를 마음껏 녹음했다.
1970년대 소위 '로프트 재즈'를 이끌었던 샘 리버스
'60년대 재즈 컴포저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던 작곡가 칼라 블레이는 '70년대 자신의 음반사 와트와 10인조 밴드를 만들어 '77년 첫 유럽 투어에 나섰으며 길 에번스 오케스트라 출신의 알토주자 아서 블라이드는 로프트 재즈 연주자들의 역량을 한데 담은 [Lenox Avenue Breakdown]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