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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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humann
- 이아경
- 앨범 평점 3.5/ 6명
- 발매일 : 2017.10.18
- 발매사 : (주)디지탈레코드
- 기획사 : KOO Company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그려낸 슈만의 기쁨과 슬픔
(frauenliebe und - leben op.42)
한국의 메조소프라노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이아경'. 벨리니 국제콩쿠르를 비롯해 이탈리아의 여러 권위 있는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아경은 그 사이 데뷔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메조소프라노다.
1999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윤이상의 '심청'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아경은메노티의 '메디움', 브리튼의 '앨버트헤링' 등의 다른 현대오페라 작품에서도 뛰어난 무대장악력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오페라 관객들에게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베르디 주역 메조소프라노로서의 모습일 것이다.
영화 '콰르텟'으로도 유명해진 베르디 '리골레토'의 3막 4중창은 주역가수 네 사람이 제각기 다른 심경을 노래하는 오페라사의 명장면이다. 그러나 이 4중창은 넷 중 메조소프라노에게 가장 불리한 음악이다. 살인청부업자의 여동생으로 테너 주인공을 유혹하는 역할을 맡은 막달레나 역의 메조소프라노가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과 나란히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는 오케스트라와 다른 가수들의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러나 2007년 서울시오페라단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했을 때 이아경은만토바 공작, 질다, 리골레토와의 4중창에서 남다른 성량과 안정된 발성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객석에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 기막힌 4중창의 묘미가 제대로 살아났다.
같은 해에 서울시오페라단이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공연했을 때 이아경은 점쟁이이며 주술사인 울리카 역을 맡았다. 무대가 어두워 집중도가 떨어질 수도 있는 동굴의 접신 장면에서 이아경은 강렬한 음색과 풍성한 음량, 탁월한 연기력으로 관객을 단번에 무대에 집중시켰다. 국립오페라단이 2011년에 같은 작품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렸을 때도 이아경은 역시 울리카 역을 맡아 카리스마로 충만한 저음과 더욱 깊어진 역할 해석을 보여주었다.
'가면무도회'의 울리카에 비해 베르디의 '운명의 힘' 에 등장하는 점쟁이 프레치오실라 역은 훨씬 가볍고 활기 있게 관객을 매혹해야 하는 배역이다. 울리카 같은 묵직한 점쟁이와는 상당히 다른 역할이었지만, 2009년 서울시오페라단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 이아경은 노련한 가창과 연기로 이 공연의 엔터테이너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아경이 가장 사랑하는 베르디 배역은 아마도 '아이다'의 암네리스 역일 것이다. 주로 나이든 여성 역할을 맡게 되는 메조소프라노에게는 드물게, 사랑에 빠진 젊은 여주인공의 다층적인 심경을 표현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2004년 국립 오페라단과' 2013년 서울시오페라단의 '아이다' 공연에서도 이아경은 최고의 암네리스를 열연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오페라 공연에서 그것이 어떤 역이든 '이아경'이 메조소프라노 배역을 맡는다면 일단 마음이 든든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기대할 수 있었다. 오페라가 아닌 오라토리오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한국 성악 무대를 오랜 시간 힘 있게 받쳐온 이아경이 이번에는 슈만 가곡에 도전했다. 2016년 한국가곡 음반 '그대 있음에'와 데뷔 20주년 실황음반을 내놓은데 이어 이번에는 로베르트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연가곡op.39'여인의 사랑과 생애Frauenliebe und Leben'을 선보인다.
결혼을 반대하던 장인 비크의 동의 없이도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을 얻은 1840년, 슈만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으로 하염없이 솟아나는 멜로디를 악보에 옮겨 138편의 리트(Lied. 예술가곡)를 작곡했다. 그래서 이 해는 슈만의 생애에서 '가곡의 해'로 불린다. 연가곡'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가곡모음집Liederkreis'이 모두 이때 완성되었다. 이 중에서도 '여인의 사랑과 생애'는 결혼이 가능하다는 판결을 받은 직후 슈만이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한 처녀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남자는 처녀에게 너무나 높고 빛나는 존재여서 처녀는 감히 그 곁을 꿈꾸지 못한다. 그런데 남자는 거짓말처럼 처녀에게 청혼하고, 처녀는 이 믿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노래한다. 드디어 결혼식이 거행되고, 처녀에서 여인으로 변모한 그녀는 아이의 탄생을 경험하며 최고의 행복을 노래한다. 그러나 어느날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고 여인은 슬픔에 잠기게 된다.
이연가곡을 구성하고 있는 여덟 곡의 조는 계속 바뀌지만 기본이 되는 조성은 나(B)조로, B로 시작해서 B로 끝난다. 전체적으로 깊고 어두운 분위기여서, 소프라노도 부를 수 있지만 음역이나 음색 면에서 이아경처럼 풍부한 소리를 지닌 메조소프라노에게 적합한 곡이다. 첫 곡 ‘그이를 처음 본 이후 Seitichihngesehen’에서부터 이아경은 마음속이 눈물로 가득한 사랑에 빠진 처녀의 심경을 진지하고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2곡이나 3곡의 들뜨고 행복한 분위기도 잘 소화했지만, 역시 이아경의 강점은 여인이 남편의 죽음을 겪고 노래하는 ‘당신은 내게 처음으로 고통을 안겨줬어요’ 같은 드라마틱한 곡에서 최고로 발휘된다. 어둡고 통렬하게 울리는 피아노는 깊은 슬픔과 고통으로 찢기는 심정을 보여주지만, 이아경은 온갖 기쁨과 고통을 끌어안으며 성숙해진 여인의 장중한 체념으로 곡을 마무리한다.
이연가곡 외에 이 음반에는 슈만의 가곡 열 한 곡이 더 수록되어 있다. "당신은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헌정", "호두나무", "연꽃", "줄라이카의 노래" 등 슈만의 대표 가곡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이아경'의 노래는 "호두나무"다. 다가올 사랑을 꿈꾸는 처녀의 아련한 감성을 탁월하게 표현해, 노래를 듣는 이들을 푸른 호두나무의 정원으로 데려간다.
무게감 있는 베르디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에게 익숙한 감상자들에게 이 슈만 가곡 음반은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건 가을날 맑은 바람처럼 청랑하게 울리는 그의 음색이다. 선명한 고음과 안정된 저음 사이, 그 어디서도 그의 소리는 거칠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레가토를 구사한다. 꼭 필요한 부분에서는 드라마틱하지만, 가곡에서 요구하는 절제의 아름다움도 적절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요 레퍼토리로 노래해온 이아경에게슈만 가곡의 해석은 분명 쉬운 도전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의 길을 걸어온 이아경이 가곡 분야에서도 더욱 단단하게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음악평론가 이용숙)